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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룡(全命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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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유(伯兪)
호(號)영서(𤃡西)
생년1606(선조 39)
졸년1667(현종 8)
시대조선중기
본관옥천(沃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전대승(全大承)
함양박씨(咸陽朴氏)
외조부박운(朴雲)
저서『영서집』

[상세내용]

전명룡(全命龍)
1606년(선조 39)∼1667년(현종 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백유(伯兪), 호는 영서(𤃡西).

부친은 전대승(全大承)이며, 모친은 함양박씨(咸陽朴氏)부호군 박운(朴雲)의 딸이다. 유년시절에 작은아버지인 중승(仲承)으로부터 배웠다.

1623년(인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162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30년 성균관학정 겸 봉상시봉사에 제수되었다.

2년 후 성균관박사 겸 양현고직장성균관전적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3년 예조좌랑으로 춘추관에 재직하면서 소신있는 포부를 펼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사직을 청원하여 흥덕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때 청렴결백한 태도와 위민정책(爲民政策)을 실시하여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의 선치를 찬양하였다. 어사 심동구(沈東龜)가 그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여 임금으로부터 의복 한벌을 하사받았다.

1640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지내다가 1643년 경성판관으로 임명되어 낙후된 교육을 일신시켰다.

1647년 평양서윤, 1650년(효종 1) 흥양현감, 1654년 자인현감, 1659년 풍기군수영암군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영암에 재직하면서 흉년이 들자 부족한 진곡(賑穀)을 대동미(大同米)로 변통하여 구제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어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뒤 1662년(현종 3) 울산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665년 영해부사로 재임중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 접수된 부의금을 관비에 충당시키기도 하였다.

만년에 대사헌대사간 등에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일생동안 검소한 생활철학을 굳게 지켜, 그가 죽었을 때에는 장례를 치를 살림마저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친우들의 도움으로 치렀다.

저서로는 『영서집』 4권 2책이 있다.

[참고문헌]

𤃡西集

[집필자]

김동현(金東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