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永昌大君)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4C601CC3DB300B1606X0 |
이명(異名) | 이의(李㼁) |
생년 | 1606(선조 39) |
졸년 | 1614(광해군 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왕실 > 왕자 |
모 | 인목왕후(仁穆王后) |
모 | 공빈김씨(恭嬪金氏) |
외조부 |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
외조부 | 김제남(金悌男) |
[상세내용]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년(선조 39)∼1614년(광해군 6). 선조의 적자(嫡子). 이름은 이의(李㼁). 본관은 전주(全州)
모친은 인목왕후(仁穆王后)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그는 선조의 열넷 아들 중 유일한 정비소생으로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정례(權停例: 절차를 다 밟지 아니하고 거행하는 의식)로 공빈김씨(恭嬪金氏) 소생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뒤 정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 개봉(改封)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柳永慶)을 위시한 소북파(小北派)는 이 뜻에 영합하려 하였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는데, 왕은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유교(遺敎)를 내려 뒷일을 부탁하였다.
이 사실로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13년(광해군 5)에 소양강을 무대로 시주(詩酒)를 즐기던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이첨 등은 이 역모사건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영창의 외조부 김제남도 관계한 것으로 진술을 유도하였다.
이 결과로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뒤 조야에서는 끊임없는 구원의 상소 등이 연이었고, 형제의 의를 따지는 전은설(全恩說)과 여덟살밖에 안된 유자(幼子)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였으나, 대북파의 계속된 요구로 그 이듬해 봄에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하여 증살(蒸殺)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정례(權停例: 절차를 다 밟지 아니하고 거행하는 의식)로 공빈김씨(恭嬪金氏) 소생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뒤 정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 개봉(改封)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柳永慶)을 위시한 소북파(小北派)는 이 뜻에 영합하려 하였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는데, 왕은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유교(遺敎)를 내려 뒷일을 부탁하였다.
이 사실로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13년(광해군 5)에 소양강을 무대로 시주(詩酒)를 즐기던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이첨 등은 이 역모사건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영창의 외조부 김제남도 관계한 것으로 진술을 유도하였다.
이 결과로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뒤 조야에서는 끊임없는 구원의 상소 등이 연이었고, 형제의 의를 따지는 전은설(全恩說)과 여덟살밖에 안된 유자(幼子)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였으나, 대북파의 계속된 요구로 그 이듬해 봄에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하여 증살(蒸殺)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七庶之獄(李相佰,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七庶之獄(李相佰,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대표명 | 영창대군(永昌大君) |
명 | 의(㼁) |
봉호 | 영창(永昌), 영창대군(永昌大君), 영창대군의(永昌大君㼁) |
봉호 : "영창(永昌)"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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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