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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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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완(子完)
생년1604(선조 37)
졸년1648(인조 26)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창정(李昌庭)
조부이주(李澍)

[상세내용]

이완(李)
1604년(선조 37)∼1648년(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완(子完).

정언 이주(李澍)의 손자이며, 함경도관찰사 이창정(李昌庭)의 아들이다.

1635년(인조 13) 생원시에 합격한 다음해에 동궁세마(東宮洗馬)로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있다가 4년 뒤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선임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큰 가뭄으로 기근이 심하자 나라에서 대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때 변통책으로 구휼칠조(救恤七條)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뒤이어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병조좌랑을 역임하였고, 옥구현감으로 보직되자 해안가의 척박한 토지의 경작보다는 어염(魚塩)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어민들이 중세로 인하여 어호(漁戶)가 산망(散亡)하게 되자 각종 잡세를 폐지하도록 건의하여 부담을 경감시켜주었다.

또 읍봉(邑俸)을 들어 백성들을 진휼하고 그 자제들을 선발하여 학예를 권장하기 몇 년이 지나자 흩어졌던 어민들이 다시 돌아와 안집하게 되었다.

서울로 돌아와 예조병조정랑정언을 거치면서 업적을 크게 쌓았다.

그뒤 직강지평이 되어서 잘못되고 나쁜 짓을 밝혀 바로잡으면서 법을 잘 지켜 사사로움이 없었기에 인심이 숙연해지고 그를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1645년 큰 기근이 있자 인조는 대신에게 명하여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하도록 하고 그에게 사무를 구관하도록 하였다. 그는 각 도에 운미선(運米船)을 보내어 비축미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1648년에 다시 지평이 되었다.

이때 김자점(金自點)이 영상이 되었는데, 재이(災異)를 당해도 항상 있는 일처럼 말하고는 임금에게 권하여 토목사업을 크게 일으키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으나 그는 소를 올려 재이를 참소하고 사치와 방종, 뇌물로써 기강을 문란하게 한 이이첨(李爾瞻)의 죄를 극언하고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뒤 다시 지평이 되었으나 병으로 죽었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國朝人人物考

[집필자]

조정기(趙楨基)
대표명이완(李)
성명이완(李梡)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