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金得臣){1}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B4DDC2E0B1604X0 |
자(字) | 자공(子公) |
호(號) | 백곡(栢谷) |
생년 | 1604(선조 37) |
졸년 | 1684(숙종 1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안동(安東[舊]) |
활동분야 | 문학 > 시‧시조인 |
부 | 김치(金緻) |
모 | 사천목씨(泗川睦氏) |
외조부 | 목첨(睦詹) |
저서 | 『백곡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득신(金得臣)
1604년(선조 37)∼1684년(숙종 10).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안동(安東[舊]).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
부친은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이며, 모친은 사천목씨(泗川睦氏)로 목첨(睦詹)의 딸이고, 아내는 경주김씨이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당시 한문 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치력하였는데, 그 중 「백이전(伯夷傳)」은 억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다.
저술이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문집인 『백곡집』에는 많은 글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언‧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용호(龍湖)」‧「구정(龜亭)」‧「전가(田家)」 등은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안목도 높아, 『종남총지(終南叢志)』 같은 시화도 남겼다.
이에는 어무적(魚無迹)‧이행(李荇)‧정사룡(鄭士龍)‧정철(鄭澈)‧권필(權韠) 같은 앞 세대 유명시인 등과 남용익(南龍翼)‧김석주(金錫胄)‧홍만종(洪萬宗) 같은 당대 문사들의 시를 뽑아,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비평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부친은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이며, 모친은 사천목씨(泗川睦氏)로 목첨(睦詹)의 딸이고, 아내는 경주김씨이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당시 한문 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치력하였는데, 그 중 「백이전(伯夷傳)」은 억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다.
저술이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문집인 『백곡집』에는 많은 글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언‧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용호(龍湖)」‧「구정(龜亭)」‧「전가(田家)」 등은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안목도 높아, 『종남총지(終南叢志)』 같은 시화도 남겼다.
이에는 어무적(魚無迹)‧이행(李荇)‧정사룡(鄭士龍)‧정철(鄭澈)‧권필(權韠) 같은 앞 세대 유명시인 등과 남용익(南龍翼)‧김석주(金錫胄)‧홍만종(洪萬宗) 같은 당대 문사들의 시를 뽑아,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비평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참고문헌]
柏谷文集(李家源編, 태학사 영인, 1985)
종남총지연구(허경진, 연세어문학 11, 1978)
종남총지연구(허경진, 연세어문학 11, 1978)
[집필자]
김영(金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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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