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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징지(尹澄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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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거원(巨源)
호(號)기암(棄庵)
생년1601(선조 34)
졸년1663(현종 4)
시대조선중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윤환(尹㬇)
생부윤훤(尹暄)

[상세내용]

윤징지(尹澄之)
1601(선조 34)~1663년(현종 4).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거원(巨源)이며, 호는 기암(棄庵)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증조부는 윤변(尹忭)이고, 조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며, 생부는 감사 윤훤(尹暄)이다. 그러나 종숙(從叔)인 윤환(尹㬇)의 양자로 들어갔다. 외조부는 심의겸(沈義謙)이다.

1624년(인조 2) 증광시 생원 3등 66위로 입격하였으며, 1625년(인조 3) 문과 별시에서 을과 1위로 급제하였다. 1626년(인조 4)에는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생부인 윤훤이 평안감사로 평양성을 지키지 못하자 조정에서 군율로 사형을 내렸다. 당시 윤징지(尹澄之)는 부친에게 잠시 피했다가 뒤에 도모하자는 계책을 올렸는데, 윤훤이 이를 따라서 평양성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이 때문에 부친이 사형당했다는 자책감으로 윤징지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1654년(효종 5) 이조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시골에 은퇴한 윤징지가 출신(出身)한 지 30년이 되도록 6품으로 승직하지 못하였다고 상소하여 6품직을 제수하였다. 1655년(효종 6)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고, 이후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병조정랑, 금산군수 등에 보임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여강에서 30여 년 동안 은거하다가 1663년(현종 4) 죽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집필자]

나영훈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