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申垓)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2E0D574FFFFB1599X0 |
자(字) | 중원(仲遠) |
생년 | 1598(선조 31) |
졸년 | 1637(인조 1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평산(平山) |
활동분야 | 문관 |

부 | 신경인(申景禋) |
생부 | 신경진(申景禛) |

[상세내용]
신해(申垓)
1598년(선조 31)~1637(인조 15). 조선 중기 문관. 자는 중원(仲遠)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무신가문 출신으로 조부는 임진왜란 당시 유명한 장군이었던 신립(申砬)이며, 부친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한 정국공신 충익공(忠翼公) 영의정 신경진(申景禛)이다. 신경진의 막내동생인 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禋)의 양자로 들어갔다.
1618년(광해군 10) 식년시 생원‧진사시에서 3등 60위로 입격하였다. 인조반정 당시 국왕을 정성스럽게 모신 공이 있다하여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에 제수되었다. 이후 주로 지방관을 맡아 다스렸다. 1627년(인조 5)에는 이천부사로 재직하였으나 상가(賞加) 개정 중에 사조(辭朝)한 죄목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632년(인조 10) 배천군수로 재직 시에는 중화현감(中和縣監)으로 재직할 당시 싸움터에 나가기 싫어하여 직무를 유기했다는 죄목으로 탄핵되어 파직되었다.
1637년(인조 15)에는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으로 제수되었는데, 재상의 아들과 조카가 세자를 모시고 인질로 잡혀갈 때 이를 따라갔다. 그러나 평안도 영유(永柔)에 이르러 여사(旅舍)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40세였다. 이에 영의정 평원군(平原君)에 추증되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무신가문 출신으로 조부는 임진왜란 당시 유명한 장군이었던 신립(申砬)이며, 부친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한 정국공신 충익공(忠翼公) 영의정 신경진(申景禛)이다. 신경진의 막내동생인 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禋)의 양자로 들어갔다.
1618년(광해군 10) 식년시 생원‧진사시에서 3등 60위로 입격하였다. 인조반정 당시 국왕을 정성스럽게 모신 공이 있다하여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에 제수되었다. 이후 주로 지방관을 맡아 다스렸다. 1627년(인조 5)에는 이천부사로 재직하였으나 상가(賞加) 개정 중에 사조(辭朝)한 죄목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632년(인조 10) 배천군수로 재직 시에는 중화현감(中和縣監)으로 재직할 당시 싸움터에 나가기 싫어하여 직무를 유기했다는 죄목으로 탄핵되어 파직되었다.
1637년(인조 15)에는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으로 제수되었는데, 재상의 아들과 조카가 세자를 모시고 인질로 잡혀갈 때 이를 따라갔다. 그러나 평안도 영유(永柔)에 이르러 여사(旅舍)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40세였다. 이에 영의정 평원군(平原君)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나영훈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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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