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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유(張以兪)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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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유(子裕)
호(號)지분헌(知分軒)
생년1598(선조 31)
졸년1660(현종 1)
시대조선중기
본관인동(仁同)
활동분야호국 > 의병

[상세내용]

장이유(張以兪)
1598년(선조 31)∼1660년(현종 1). 조선 중기 의병‧유학자. 자는 자유(子裕)이고, 호는 지분헌(知分軒)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거주지는 경상남도 성주(星州)이다.

증조부는 장잠(張潛)이고, 부친 장봉한(張鳳翰)과 모친 참봉(參奉) 유수(兪遂)의 딸 창원유씨(昌原兪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에게서 『효경』과 『소학』 등을 배우며 군자의 행동거지에 대해 익혔으며, 1608년(선조 41) 선조가 죽자 어린 나이에도 군신간의 의리를 주장하며 5일간 음식을 먹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 6) 송아헌(宋啞軒)에 나아가 공부하였으며, 1633년(인조 11) 식년시 생원 3등 2위로 합격하였다. 1635년(인조 13) 「퇴계선생변무소(退溪先生辨誣疏)」와 「재소(再疏)」를 올려 퇴계 이황의 무고함을 밝혀달라고 청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킨 이도창(李道昌)을 따라 종군하지는 못하였지만 대신 관향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직무를 맡아 최선을 다하였다. 1642년(인조 20) 스승 장현광을 천곡서원(川谷書院)에 배향하고 스승을 기리는 문장을 지었다. 만년에는 눈이 어두워지면서 더욱 세상에 뜻을 잃어 영귀당(詠歸堂)에 올라 시를 지으며 소요하였다.

문집으로 후손들이 1860년(철종 11)에 간행한 시문집 『지분헌집(知分軒集)』가 전하는데, 문집 가운데에는 병자호란 때 군량미를 모집하면서 이도창에게 보낸 편지글 「여의병장이도창서(與義兵將李道昌書)」, 사람마다 자신의 분수가 있으니 이를 알면 삶을 올바로 살 수 있다는 「지분당기(知分堂記)」, 안빈낙도하는 선비의 인생관을 드러낸 「고연기(古硯記)」, 그 밖에 「잡설(雜說)」‧「정헌설(靜軒說)」 등이 있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