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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휘지(崔徽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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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금(子琴)
호(號)오주(鰲洲)
생년1598(선조 38)
졸년1669(현종 10)
시대조선중기
본관삭녕(朔寧)
활동분야기타 > 처사
최연(崔{艸+衍})
조부최상중(崔尙重)
처부이유간(李惟侃)
처부양준우(梁俊遇)

[상세내용]

최휘지(崔徽之)
1598년(선조 38)∼1669년(현종 10).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洲).

조부는 노봉서원(露鋒書院)에 제향된 최상중(崔尙重)이고, 부친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최연(崔 艸+衍)이며, 처부는 이유간(李惟侃)양준우(梁俊遇)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이 있었으나, 학문에 뜻을 두어 경전과 『근사록(近思錄)』을 연구하는데 전념하였다. 1624년(인조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금오랑(金吾郞:의금부에 속한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낙향하였다. 1631년(인조 9) 찰방(察訪)에 제수되어 청렴하고 성실히 관직에 임하여,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계부(季父) 최온(崔蘊)과 의병을 일으켜, 청주(淸州)과천(果川)으로 진입하였으나, 이미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북쪽을 향하여 통곡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오로지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59년(효종 10) 북벌에 대한 뜻을 가지고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제수하였으나 그나마도 얼마 있지 않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계속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노봉서원(露鋒書院)에 제향되었다. 시(詩)와 서(書)에 능통한 학자로 관직에 미련이 없었으며, 산수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풍치를 좋아하였다.

아들로 최치옹(崔致翁)최계옹(崔啓翁), 최시옹(崔是翁)이 있다.

문집으로 『오주집(鰲洲集)』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kr)
전주한옥마을 백과사전(http://hanok.jeonju.go.kr)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