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임덕후(任德後)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84B355D6C4B1597X0
자(字)창백(昌伯)
생년1597(선조 30)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풍천(豊川)
활동분야문신
임수정(任守正)

[상세내용]

임덕후(任德後)
1597년(선조 30)~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창백(昌伯)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증조부는 임윤(任尹)이고, 조부는 형조판서(刑曹判書)‧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지낸 임국로(任國老)이다. 부친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임수정(任守正)이고, 모친은 김우서(金禹瑞)의 딸이다. 동생은 임여후(任汝後)‧임유후(任有後)‧임지후(任之後)이다.

1627년(인조 5) 정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허균(許筠)‧황정필(黃廷弼)‧하인준(河仁浚) 등이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역모를 꾸몄을 때 참여하였다. 허균이 역모가 성공한 후 함께 한 유생들을 모두 급제시켜 주겠다며 그 명단을 적은 책자가 있었는데, 그 책이 김개(金闓)‧원종(元悰)‧임덕후의 집에 있다는 황정필의 진술에 따라 심문을 받았다가 석방되었다. 1623년(인조 1) 함열현감(咸悅縣監)에 제수되었고, 1628년(인조 6) 이종충(李宗忠)‧오현(吳玹)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가 심문을 받았다. 1634년(인조 12)에는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재직하였는데, 사헌부(司憲府)가 임덕후는 광해군 때 총애를 받던 궁인의 족속이고, 그와 함께 한 무리들이 반정이 일어난 뒤 모두 처벌을 받았는데, 그만이 처벌을 면하고 다시 주부(州府)의 중임을 맡았다며 그를 파직할 것을 간언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承政院日記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