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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익(趙壽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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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정(士靜)
호(號)만한(晩閑)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596(선조 29)
졸년1674(현종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순창(淳昌)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직(趙稙)
외조부유성룡(柳成龍)

[상세내용]

조수익(趙壽益)
1596년(선조 29)∼1674년(현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사정(士靜), 호는 만한(晩閑).

부친은 조직(趙稙)이며, 모친은 유성룡(柳成龍)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이듬해 세마(洗馬)가 되었다. 찰방으로 오른 뒤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1635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와 다시 정언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으며, 인조가 다시 강화도로 가려고 할 때 채유후(蔡裕後)와 더불어 적에게 발견될 위험이 있다 하여 이를 만류하였다.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화론을 제창하자 끝까지 싸울 것을 삼사와 더불어 극간하였으며, 이듬해 헌납을 거쳐 이조좌랑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638년에는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이후 다시 언관직으로 돌아와 응교집의사간을 지냈다.

1645년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사은 겸 주청사(謝恩兼奏請使)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경직(京職)으로 복귀하여 대사간부제학대사성 등을 지낸 뒤 1651년(효종 2)에는 이조참의로서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어 대사성대사헌이조참판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660년(현종 1) 호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이때 예론(禮論)이 일어나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본격화하자 남인인 권시(權諰)조경(趙絅)을 비호하는 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1663년 병조참판으로 전임되었으나, 남인의 실세(失勢)를 보고 스스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다시 한성부우윤으로 재기용되었고, 형조예조참판, 한성부좌윤을 역임한 뒤 167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판서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嶺南人物考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