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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許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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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화보(和甫)
호(號)미수(眉叟)
시호(諡號)문정(文正)
생년1595(선조 28)
졸년1682(숙종 8)
시대조선중기
본관양천(陽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허교(許喬)
조부허강(許橿)
증조부허자(許磁)
외조부임제(林悌)
저서『동사(東事)』
저서『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저서『경설(經說)』
저서『경례유찬(經禮類纂)』
저서『미수기언(眉叟記言)』

[관련정보]

[상세내용]

허목(許穆)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1. 가계 및 성장기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별제 허강(許橿)의 손자이고, 현감 허교(許喬)의 아들이며, 모친은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옹(鄭彦㝘)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아버지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峰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2. 관력과 행적
1626년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하여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그는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를 명하였는데, 뒤에 벌이 풀렸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영동(嶺東)으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릉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으며, 1638년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게 되었다.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으며, 그뒤 창원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공조정랑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을 만나 소를 올려 군덕(君德)과 정폐(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이에 사복시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1659년 장령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주도하는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을 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玉几銘)을 지어 바쳤다.

이어 둔전의 폐단을 논하였다. 이해 효종이 죽자 상소로써 상례를 논하였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경연(經筵)에 출입하였고, 다시 장령이 되어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하여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는데, 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3. 복제논쟁
당시 송시열 등 서인(西人)은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맏아들과 중자(衆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朞年服: 1年喪)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의례(儀禮) 주소(註疏)에 의거하여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에 해당된다고 해석하여 기년복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또 종묘의 제사를 주재하여 사실상 맏아들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하여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674년 효종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대공(大功)으로 9개월복을 정하였으나 대구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해복제가 거론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맏아들‧중자의 구별이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하였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기년, 중자처는 대공으로 구별하여 규정하였다.

그런데 인선왕후에게 대공복(大功服)을 적용함은 중자처(衆子妻)로 대우함이고, 따라서 효종을 중자로 보기 때문이었으며 이에 대한 근거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고례(古禮)의 체이부정설이었다.

이는 효종의 복제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새로이 즉위한 왕, 즉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기해복제가 잘못이라 판정되어 송시열 등 서인은 몰리게 되고 그의 견해가 옳았다고 인정되어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그는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고, 병이 나자 숙종은 어의를 보내어 간호하기까지 하였다.
4. 왕의 총애와 실각
1675년(숙종 1)이조참판비국당상(備局堂上)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고,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조로 특진되었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일(遺逸)로서 삼공(三公)에 올랐다. 이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 이로 인하여 남인은 양파로 갈라져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대립,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體府)‧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지패법(紙牌法)‧축성(築城) 등을 반대하였으며, 이해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箚子)를 올려 치병사(治兵事)‧조병거(造兵車)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해 사임을 아무리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아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예궐하였다.

특명으로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는데 음사(蔭仕)로서 기로소에 든 것은 특례였다.

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하여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하는 윤휴(尹鑴)에 맞서 그 폐(弊)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5. 업적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그의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東事)』『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경설(經說)』『경례유찬(經禮類纂)』『미수기언(眉叟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으며 나주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記言
許穆의 學問과 思想(金吉煥, 韓國學報 18, 1980)

[집필자]

송찬식(宋贊植)

성명 : "허목(許穆)"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4孝廟大喪議慈懿大妃服制吏判宋時烈主四種說朞年而首相鄭太和以國制朞年定行尹鐫許穆尹善道權諰輩以斬衰三年爲是陳疏力爭遂有甲寅追罪之擧
國朝編年v08汻磁李芑乃是我朝極惡土懟心此乃曾孫許穆撰碑之辭不可信也鄭北窓沈聽天無爲其父祖蓋愆而名▣不扝則許磁之愆豈能盡益乎許穆眞猶愚也豈聖於舜禹乎
國朝編年v12語又謂明道竝用熙豊豈不悖哉其不可以論篤而與之者明矣彼雖以不負思菴自明而其向背之著於行事者終有不可掩者許眉叟所撰傳中又引其與沙溪問答求觀書冊之語沙溪嘗以其受學思菴之事問於介淸答曰思菴宅多有書冊往來借觀之沙溪痛
紀年便攷v26言非徒議禮之大經實是謀國之至計而宋時烈引䟽說立次長亦為三年之文而其下又曰今必得次長不為庶子之明文然後許穆之說乃可従也今我孝宗是仁祖之次長而疏說旣有立次長亦為三年之明文則大王大妃之服齊哀三年實無亳髪可疑何必
紀年便攷v26次長而疏說旣有立次長亦為三年之明文則大王大妃之服齊哀三年實無亳髪可疑何必更責必得次長不為庶子之明文於許穆也時烈之議称長子成人而死者至再至三而其緊要㫁定之語曰長子雖成人而次長皆名長子服斬則嫡統不嚴云盖其言必
紀年便攷v26子者果為獨指妾子而次嫡以下不與否乎且疏說旣曰立次長亦為三年而其下又曰庶子承重不為三年此二說自相矛盾故許穆必以庶子為妾子而次長則不與焉今必得次長亦為庶子之明文然後乃可従也且賈疏只言第一子死而不言第一子無後而
紀年便攷v26亦為庶子之明文然後乃可従也且賈疏只言第一子死而不言第一子無後而死則此恐是未成人而死者也此正緊要處而今許穆之說似不細考立文之本意而遞然立說然則檀兮之免子游之衰果皆不足恤乎且以人情事勢推之長子雖已成人而死而次
紀年便攷v26獻議以定領敦寕李景奭議曰當初獻議旣以遵先王之制之意為對今許穆以為非古禮臣不冝更有所議判中樞元斗杓議曰許穆䟽說皆是經傳明文何敢更容他論禮所謂曰四種之說盖為父王為庶子之喪也非謂母后為承統主社之嫡子降従朞服也臣
紀年便攷v26在幼稚之年而不含不贈不立主其父不為之服不成為嫡然後立次嫡為嗣而謂之長子此長子死則乃服三年耶若果如此則許穆之說恐未得為正論所謂立庶子為後不得為三年妾子故也云則此固䟽說而妾子故三字則是許穆自下之說非䟽說也夫所
紀年便攷v26乃服三年耶若果如此則許穆之說恐未得為正論所謂立庶子為後不得為三年妾子故也云則此固䟽說而妾子故三字則是許穆自下之說非䟽說也夫所謂庶子者固謂妾子然自次嫡以下則雖人君母弟亦謂之庶子故䟽有庶子妾子之號嫡子第二者同
紀年便攷v26斬則非但嫡統不嚴為父者一身之上其斬不已多手父至尊也女子出嫁猶不敢服斬其不貳斬之意截然矣况父之於子乎盖許穆徒知第二子承重者服朞不見於經而不知第一子成人而死而第二子承重者斬亦不見於經也若曰帝王當以即位者為統而
紀年便攷v26旣練之後期服已除雖欲悔之不可及也上命大臣儒臣獻議以定領敦寕李景奭議曰當初獻議旣以遵先王之制之意為對今許穆以為非古禮臣不冝更有所議判中樞元斗杓議曰許穆䟽說皆是經傳明文何敢更容他論禮所謂曰四種之說盖為父王為庶
紀年便攷v26乃反以臣服君之服服大王手况大王大妃於昭顯之䘮旣與仁祖同為長子服則其義何可變於今日手左參䝺宗浚吉上劄曰許穆之䟽引經㩀義臣於此論亦不䏻無疑者盖儀禮父為長子通上下而言者也若如稷之說則設令大夫士嫡妻所生有十餘子而
紀年便攷v26祥貞熹王后果従吉矣左議政沈之源曰當初獻議旣不外於五禮儀而實錄所載又如此喪禮宜従先祖也上遂命勿改服制○許穆因宋浚吉劄論服制上䟽申辨仍進喪服圖及練服變改之節上以穆所進問議於宋時烈時烈又㩀禮辨明上遂従朞服之議○
紀年便攷v26為齊哀三年昭然明矣當初禮官服制儀注定為朞年之服國家宗統因此而有所不明此豈明大統定民志固宗社之禮也嗚呼許穆之言非徒議禮之大經實是謀國之至計而宋時烈引䟽說立次長亦為三年之文而其下又曰今必得次長不為庶子之明文然
紀年便攷v26亦豈有搆禍士林之意哉夫人各有見不可苟同而是非得失於是著焉今欲惡其不同者强而同之稍有異論則必羣起而攻之許穆再上論禮之䟽斥出遠郡權諰獨立赤職即被重劾趙絅一言救善道則指之謂奸邪并其子亦被永不叙用之律夫絅以累朝耆
紀年便攷v26儀禮又有尊同則服其服之文母后之於國君其尊既同則其所服制冝服本服若所謂五屬之親恐不并指母后而言也右議政許穆議曰父為子斬以正軆傳重也母為子齊哀不得過於子為已矣司服凡喪為天子斬䟽言諸侯諸臣為王斬不言母為子斬五服
紀年便攷v26三學士事積以喜事釣名為對上曰事係天朝大義當如此况終殺身成仁不可謂釣名肅宗丙辰設軆府㕔自為都軆察使乙未許穆以至親論劾庚申鄭太和之復配廟庭也尹䥴李夏鎮李袤等交章詆斥積以領相入對陳辨是年㘴子堅獄免為庶人有器局而
紀年便攷v26耻菴金集門人有學行薦授童教不就拜副率出謝旋免薦除二邑尹䥴送子要見不徃䥴来訪責以理義不受趙威明之饋不答許穆之問應旨上萬言䟽可作永世章程肅宗壬申卒年六十五
紀年便攷v27厼妄發許穆托以焚黃乞暇歸鄕上勉留不許此乃清南濁南分黨之始也○備邉司以五家統事目二十一條書入○命右議政許穆入耆社筵臣奏言穆位至三公年八十二其所魚任如領經筵監春秋館事皆文吏之職而獨不入耆社乎上許之○漢城府上今
紀年便攷v27賤役○命楨㮒特為放送因大旱疏决上曰楨㮒以骨肉至親異於他人雖其罪犯重大久竄遐方心所不忍特為放送○右議政許穆乞暇歸鄊不許正言李壽慶劾奏領議政許積左議政権大運甚非其人金徽為吏叅不職而復擬吏判望閔黯素乏時望而入於
紀年便攷v27直道見斥也於是金海一李沅李堂揆睦昌明李沃䓁或剳或啓迭請壽慶之罪而正言李瑞兩極論壽慶之直言出於率厼妄發許穆托以焚黃乞暇歸鄕上勉留不許此乃清南濁南分黨之始也
紀年便攷v27說不足掛齒優荅之工曺判書洪宇遠上䟽請罪壽慶曰分朋植黨櫅排揑䧟以亂朝廷不出壽慶旡以重國軆靖朝著矣右議政許穆上剳伸救曰壽慶以直諌聞夫誰曰壽慶以罪得罪也必以為直道見斥也於是金海一李沅李堂揆睦昌明李沃䓁或剳或啓迭
紀年便攷v27舉子䓁言顯意大有觸諱不可著述不得已政題以試之右議政許穆上剳言披陰附時烈亂統之說用意旡狀上命罷榜試官李正英李弘淵尹深䓁并㝎配秦輔以最末試官乃以廢少立長之文出
紀年便攷v27許穆尹鐫
紀年便攷v27有甚於清南之濁清南之濁有勝於濁南之濁両得此名目邪以臣見之則正如雌烏䧺島之難卞鼎底釜底之相訾耳○右議政許穆上剳請行戶布大司憲李袤諌曰兮年大無此何䓁時而設此法増其怨乎臣興儒臣尹鐫素相葉悅學問文藝旡出此右而其於
紀年便攷v27拿鞫杖死其餘趙根申啓澄䓁分配有差上命政院曰凶險之徒更以禮律一欵陳䟽者當以逆律論㫁事宣布中外柳命天沈擅許穆䓁請宋時烈按律不許只命絶島荐棘
紀年便攷v27邊李翊金益勳李選遠竄南龍翼削黜○命吳始復洪宇遠李袤李元楨李德周并復官㮒㯙圍籬煥爀放歸田里○命故右議政許穆致祭故㕘議尹善道父子謚爵還給故吏曺判書尹鐫復官賜祭○罪人李光漢李金重夏金煥䖏斬金益勳朴斌物故李立身南
紀年便攷v28許穆
紀年便攷v28許穆磁曽孫縣監喬子林悌外孫李元翼孫婿 宣祖乙未生字文父一和父號眉叟又圖南鄭述張顯光門人手有文字足有九疇眉
紀年便攷v28亥以掌令因禮訟黜三陟竪東海退潮碑 顯宗甲寅八十以老陞通政歴吏参叁䝺吏判肅宗乙卯八十一拜右相是年筵臣奏許穆位在三公年八十一當入耆社而非文吏不得入兼任領經筵監春秋皆文吏之職獨不入耆社乎上従之許入耆社賜几杖状貌
東國歷代總目v02流尹善道○宋時烈等秉國政尹䥴忌忮之倡言大喪大妃宜服三年而定爲期制是卑主貳宗嗾善道疏訐上焚其章竄北邊而許穆洪宇遠趙絅先後持其說時烈已歸宋浚吉至是亦退
記聞v1○相權大運許穆蔭儒吳始壽閔熙閔鼎重庚申以後李尙眞金錫胄南九萬呂聖齊趙師錫鄭載嵩李䎘李端夏己巳以後睦來善特拜金德遠特
記聞v1今上庚子掌令許穆上疏言大王大妃期服之失請令禮官儒臣雜議追正禮曹收議領相鄭太和以爲當初禮官以大王大妃服制請問于大臣儒臣
俟百錄v1禮曹啓曰臣絳矒無知識莫重之禮不敢輕議當初大王大妃殿服制議定時直請議大臣亦令儒臣同議而定爲期年之制矣許穆以爲齊衰三年無所可疑而今降爲期年爲非又言大喪之練在前旣練之後期服已除雖欲悔之不及也竊恐初以期年成服仍
俟百錄v1疏說而其於疏說有未能十分無疑者故以爲與其輕用可疑之疏說斷定莫重之變禮無寧近從大明之制猶爲寡過也今者許穆之疏引證雖多然其緊要有二致其一長子死立第二長者亦名長子而服斬也其二立庶子爲後不得爲三年妾子故也臣之所
俟百錄v1之禮誠有可疑者臣於此尤不勝瞿然之至蓋嘗告諸相臣請考實錄以來以爲更議之地而想朝家多事有所未遑矣今者掌令許穆之疏引經挑義論說甚勤臣於此論雖不敢索言相論而亦有所不能無疑者蓋儀禮文爲長子通上下而言者也苦如穆之說
俟百錄v1思之及此骨驚心寒此誠不可不卽議釐正而練期將迫寥寥無一人爲國家進此言者臣宴居深念不勝宗社之憂頃聞前掌令許穆考挑禮經投進一疏臣誠爲喜國家之有人也嗚呼許穆之言非徒議禮之大經實是謀國之至計非明於天理之節文而純於
俟百錄v1游哀之說乎當初大宋收議中有曰賈疏只言第一子死而第一子不言無后死則此恐是未成人而死者也此正緊要處而今許穆之說似不細考立文之本意也而遽然立說則檀弓之兔子游之哀果皆不足恤乎云檀弓之免子游之衰見於禮記檀弓篇考其
俟百錄v1體而不正乃引明制母爲長子期之文定爲期服時驪江在闕外以爲當服三年之制與尤庵不合驪聞者多疑之是歲夏掌令許穆陳疏以期服爲非是請因練日政爲齊衰三年蓋驪江之說也命收議於儒臣尤庵獻議辨其謬已而尹善道投疏主三年之
俟百錄v1不可苟同而是非得失於是乎著焉公論所在焉可誣也今欲忠其不同者强而同之士大夫之間稍有異論則必群起而攻之許穆再上禮論之疏則斥出遠地罷歸之後無復收用權諰纔立赤幟則卽被重劾趙絅一言救善道則指之謂奸邪竝其子亦
小華龜鑑v1其誕而戲之讓寧雖以荒淫失德天資倜倘遊獵之外無他着好善終太平煙月光廟扁其江亭曰榮福及卒命立祠號至德祠○許穆撰至德祠記曰忠寧大君生有聖德百姓歸心世子心知之佯狂逃去以讓之三公率百官請廢之立忠寧爲世子因放禔于廣州
龍問門答v1皆非耶南人之中豈無君子西人之中亦無小人也余曰非但至壬戌至己巳戊申而皆南人之罪也子所謂云云之君子如許穆尹鎸尹善道輩首起已亥禮論搆殺尤翁其徒權大運睦來善閔黯等暗結希載釀出廢母之議其所謂禮訟者是爲己巳之
龍問門答v1形跡之所露者又無餘矣朱子所謂賊一邊者是也噫終始沈染於䥴穆之輩故牛溪墓誌亦受趙絅之文而篆用許穆之筆此亦世道之一大變㤑也宣擧牛溪之外孫也以其外孫而阿好於南此何足㤑也其子文濬壬辰之亂多有疏迂之事以
歷代帝王紀年v01金錫胄斯百李明漢天章白洲吏判許穆眉叟
國朝捷錄v01君浩女丙寅五月二十一日誕降戊戌二月七日昇遐籍靑松惠陵楊州酉坐○浩相臣悅玄孫監司權孫逆維賢父○丙寅三月許穆以襄陽府府使上疏請冊封尤庵退憂堂諸大臣亦上疏曰若有正宮螽斯之慶則何必急急爲哉云
國朝捷錄v01許 穆
國朝捷錄v01鄭仁弘德遠荿庵左相力主廢母宋時烈文正公左相許穆和夫眉叟文正公朴世采和叔玄石文純公左相尹拯子仁明齋文成公左相權尙夏遂庵文純公左相
國朝捷錄v01朝故終身不仕逸掌令不仕公密贊反正之謀而反正之日走敀故里云金佐明子正敀川兵判金壽恒文谷金壽恒雲谷八分體許穆善篆尹舜擧孝直童土掌令善艸尹文擧汝望石湖吏判童土弟晋體宋時烈善大字宋浚吉同春晋體金大德得之蘇峯參判善
光海喪謄錄n1-1책陷者自本官 略加修補且禁火耕恐或無妨伏惟上裁右議政許穆 議以爲三陟本高麗列郡洪武二十六年我太祖二年 癸酉
光海喪謄錄n1-1책則領議政許積行判中樞府事鄭知和 左議政權大運右議政許穆以爲昌嬪與諸嬪雖似有 間國家推原之禮當有限制當初不
光海喪謄錄n1-1책得宜伏推上裁領中 樞府事鄭知和病不收議行判中樞府事許穆在外大臣 之意如此上裁何如康熙十八年三月初三日右副
仁宣王后國恤謄錄: 甲寅(1674) - (1676)能詳察禮文之致仍服三年 之外無容別議伏惟上裁大司憲許穆以爲仁宣王后之喪公 主之當服齊衰三年旣有禮經明證更
孝宗國恤謄錄n1-1책 庚子三月十八日 大王大妃朞服定奪 一掌令許穆上疏內伏以臣於大喪成服之禮以爲禮官 所職當有國家舊
孝宗國恤謄錄n1-1책議大臣亦令儒 臣同議而定爲朞年之制是白如乎觀此掌令許穆 疏中之語則有以齊衰三年禮無可疑而今降爲 朞年爲非
孝宗國恤謄錄n1-1책 庚子三月十九日 收議 一曹啓曰因掌令許穆上疏大王大妃殿服制議于大臣 及儒臣事命下矣當初議禮
孝宗國恤謄錄n1-1책 敢啓傳曰知道書啓則未下 期服議定服制收議 一掌令許穆上疏本曹回啓據曹啓自粘連啓下是 白有亦議于大臣則領
孝宗國恤謄錄n1-1책此臣之所以爲疑者也凡此二段者實臣所 疑而未敢決者今許穆斷然不疑未知只據此疏而知 其必也耶抑有佐驗於他書也
孝宗國恤謄錄n1-1책未知只據此疏而知 其必也耶抑有佐驗於他書也耶更詢於許穆則可 知矣蓋帝王之家以社稷爲重故古有捨長而立庶者
孝宗國恤謄錄n1-1책於通鮮之續則何敢不信然 不經朱程勘破則未知其說果如許穆之所云乎如或 不然則今者斷然行之恐或未安也且疏說旣
孝宗國恤謄錄n1-1책爲臣於 當初獻議旣以遵先王之制之意爲對矣今者掌 令許穆以爲非古禮臣不宜更有所議矣而當昭顯世 子之喪臣敢以
孝宗國恤謄錄n1-1책大王大妃殿服制下 詢之際與諸大臣循例獻議矣今見掌令許穆疏辭其 所論據皆是經傳明文何敢更容他議臣到益覺 不
孝宗國恤謄錄n1-1책疏說斷定莫重之變禮無寧近從大明之制猶爲 寡過也今者許穆之疏引證雖多然其緊要只有二 段其一長子死立第二長者
孝宗國恤謄錄n1-1책次嫡爲嗣而謂之長子此長子 死則乃服三年耶若果如此則許穆之說恐未得爲定 論也所謂立庶子爲後不得爲三年妾子故
孝宗國恤謄錄n1-1책爲後不得爲三年妾子故也云者 此固說疏而妾子故三字是許穆自下之說非疏說 也夫所謂庶子者固謂妾子也然自次嫡以
孝宗國恤謄錄n1-1책後不得爲三年妾子故也臣之所嘗疑而欲 知者正在於此而許穆之所以爲明證者亦在於此實 愚臣鮮疑卞惑之時也幸執大
孝宗國恤謄錄n1-1책據國制以對其時 諸大臣兩儒臣之意亦皆無異矣今見掌令許穆之 疏多引古禮之文以朞服爲非臣何敢自以爲是復 有所
孝宗國恤謄錄n1-1책子曰今用之吾從周今日所定常竊妄謂 不至於大悖已而今許穆之說如此若因此講明歸 於十分是當則豈但一時之幸而已
孝宗國恤謄錄n1-1책其前見日若非奇某幾不免爲千古罪人今 日小臣之所望於許穆者亦如此耳大抵是非交互彼 此抵捂處若無程朱大眼目大
孝宗國恤謄錄n1-1책錄以來以爲更議之地而想 朝家多事有所未遑矣今者掌令許穆之疏引經據 義論說甚勤臣於此論雖不敢索言相難而亦有
孝宗國恤謄錄n1-1책 庚子四月二十三日 遣史官往議 一以許穆所進喪服圖及練服收議傳曰今此兩條議 啓事遣史官往議
孝宗國恤謄錄n1-1책月二十八日 期服及練服問啓 一註書孟胄瑞臣承命以許穆所進喪服圖及練 服收議往于右贊成宋時烈則以爲小祥衰
洗草宴謄錄n1-1책月初十日 右議政許賜几杖擇日 一曹單子今此右議政許穆賜几杖時頒敎書事旣巳 啓下矣今十二月二十二日定日云
洗草宴謄錄n1-1책臣 李景奭賜几杖時領敎書內外宣醞而乙卯年故 右議政許穆賜几杖時則內外宣醞以國恤不爲設 行只領敎書賜几杖今
靑邱風雲v1巳首相庚辰死特復官乙卯拜父謹中祖恢曾常外李紉妻父禹鼎戶佐登科己卯死于謫中卒八十八吏郞三司號石潭許穆字煕和號眉叟陽川人文靖公以學行一年內自掌令特拜乙卯拜父喬祖橿曾磁外林悌妻父李義溥閔煕字皥
韓史綮v1當有地閥傳而李龍秀李秉文等驕矜之流其人也中世以來朋黨爲痼疾則當有偏黨傳而沈義謙金孝元李山海宋時烈許穆尹拯等其人也主改革者其跡雖似叛逆而其心稍異於叛逆則叛逆傳之外當別立改革黨傳而金玉均朴泳孝輩其人也附
東國續修文獻錄v1權大運字始會號石潭安東人文領相几杖許穆字文夫號眉叟陽川人逸左相文正閔煕字皥如號雪樓驪興人文左相庚申謫文忠吳始壽字德而號水村同
東國續修文獻錄v1南臺大官篇鄭仁弘瑞山人左相力主廢母刑宋時烈英甫尤庵恩津人左相許穆和夫眉叟陽川人右相朴世采和叔玄石潘南人左相尹拯子仁明齋坡平人右相權尙夏致道遂菴安東人左相
東國續修文獻錄v1人金佐明一正歸溪淸風人蜀尹新之君仲又玄洲海平人海崇尉義昌君宣廟第八子杞泉名琓尹文擧汝望石湖坡平人許穆見相篆東方第一趙涑希江滄江豐壤人逸掌令沈益顯可晦竹塢靑平尉蜀金大德得之蘇峯善草參贊李命殷敬叔白雲掌令
國朝人物志v1許穆
國朝人物志v2昕弟宣祖己卯進士甲午文科薦入史局刑曹判書入耆社甲申卒年七十五以長子勉之從勳贈上相許穆撰碑人物考勉之僉正子堦文科判書
國朝人物志v3許穆記言
國朝人物志v3發鄭命壽陰事雷卿被死宗一拏還削職謫盈德癸未放還辛卯爲修撰丁酉爲蔚山府使與眉叟許穆連疏論禮出配平海庚子放還年七十九卒嘗從鄭經世學經世曰金君重如山岳上同
國朝人物志v3戊寅爲弼善孝宗朝言事出補海美縣監又以譏侮當世左遷潭陽府使顯宗卽位召以司諫許穆疏論邦禮袤謂尹善道曰邦禮大論何必使許掌令專美善道慷慨上書見配絶域袤送之江上
國朝人物志v3翊相字弼卿號梅磵辛卯進士壯元顯宗庚子文科吏曹判書嘗於筵中面斥尹鐫許穆之罪其黨積憤恨嗾李有湞等投凶疏上燭其奸得不售諡文僖上同
國朝人物志v3孝宗禮陟廷議以爲孝廟於序爲次嫡大王大妃不可服三年定以期年進善尹鑴使掌令許穆再上疏以爲非是尹善道乘時亦上疏上惡其陰譎棨疏請屛裔從之鑴以宗統之說激怒衆聽棨遂上箚略曰今日
國朝人物志v3號石谷受業于尤菴宋時烈己未尙敏上疏備述禮訟始末作一冊子又陳許穆奸狀時有凶人李有湞承尹鑴嗾投書江都有宗統失序推戴王孫之語築城將李㒖送其書于
國朝人物志v3人奸通狀曰先王之所駭憂慈聖之所難處請酌恩義處王法使知懼而改行疏入楨等與其舅吳挺昌及其黨許穆尹鐫急求請對問枏楨事所從受將以迫辱佑明就金吾待罪上遣史官諭還第肅宗乙卯卒諡忠
國朝人物志v3削李劉薦剡劉後以悖倫杖流而死孝宗昇遐請行朱子君臣喪服議慈懿大妃所宜服以朞年爲定許穆疏斥朞年之失尹善道又疏論之權諰疏請原宥善道萬基遂與兪棨論善道之凶悖甲寅以
國朝人物志v3炡羅萬甲于外是爲西人岐爲老少黨之漸也肅宗甲寅尤菴宋時烈以禮訟被竄白湖尹鑴眉叟許穆進用南人滿朝庚申許堅逆獄鑴等誅死南黨見黜時烈放還西人又進用己巳權大運睦來善金德遠
國朝人物志v3仁祖丙寅文科以試官睦大欽姪女壻罷榜庚午再擢明經及第入翰苑時潛冶朴知誡力主追崇議許穆罰知誡延平李貴以聞上怒命四館罰許穆珩不奉行上怒下吏配扶餘踰年放還乙
國朝人物志v3驚人賦花王詩曰花王不語階壇上紛紛百花開何花爲丞相十歲聞南漢圍作詩曰窓前四梅樹開向黃昏月許穆言於上曰李玄逸眞儒子超拜持平未幾拜祭酒陞禮曹參判遷大司憲請罷陞補學製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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