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진(李元鎭)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6D0C9C4B1594X0 |
자(字) | 승경(昇卿) |
호(號) | 태호(太湖) |
생년 | 1594(선조 27) |
졸년 | 1665(현종 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여주(驪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지완(李志完) |
저서 | 『탐라지(耽羅志)』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원진(李元鎭)
1594년(선조 27)∼1665년(현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太湖). 판서 이지완(李志完)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으로서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귀양갔다가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다.
16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지평‧교리‧부수찬‧장령‧집의(執義) 등을 거쳐 1647년 승지에 올랐다.
1644년 교리로 있을 때 두만강의 국경을 넘어 경흥‧경원‧온성 등지에 침입하여 횡포를 자행하던 여진인에 대하여 조정의 명으로 그 선후책을 강구하였다.
또, 1648년에는 왕명으로 별시문과에서 초시를 파하려 하자, 그 부당성을 강력히 아뢰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효종 때 동래부사‧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남만인(南蠻人)30여명이 제주에 표류해 오자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현종초에는 병조참의‧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탐라지(耽羅志)』가 있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으로서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귀양갔다가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다.
16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지평‧교리‧부수찬‧장령‧집의(執義) 등을 거쳐 1647년 승지에 올랐다.
1644년 교리로 있을 때 두만강의 국경을 넘어 경흥‧경원‧온성 등지에 침입하여 횡포를 자행하던 여진인에 대하여 조정의 명으로 그 선후책을 강구하였다.
또, 1648년에는 왕명으로 별시문과에서 초시를 파하려 하자, 그 부당성을 강력히 아뢰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효종 때 동래부사‧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남만인(南蠻人)30여명이 제주에 표류해 오자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현종초에는 병조참의‧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탐라지(耽羅志)』가 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燃藜室記述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燃藜室記述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이미지]
[집필자]
이존희(李存熙)
대표명 | 이원진(李元鎭) |
명 | 원진(元鎭) |
성명 | 이감사원진(李監司元鎭), 이원진(李元鎭) |
호 | 태호(太湖) |
명 : "원진(元鎭)"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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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