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홍도(河弘度)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558D64DB3C4B1593X0 |
자(字) | 중원(重遠) |
호(號) | 겸재(謙齋) |
생년 | 1593(선조 26) |
졸년 | 1666(현종 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진양(晉陽)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하광국(河光國) |
모 | 강양이씨(江陽李氏) |
외조부 | 이광우(李光友) |
저서 | 『겸재집』 |
[상세내용]
하홍도(河弘度)
1593년(선조 26)∼1666년(현종 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중원(重遠), 호는 겸재(謙齋).
부친은 하광국(河光國)이며, 모친은 강양이씨(江陽李氏)로 이광우(李光友)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고현(古賢)과 같이 되겠다는 큰 뜻을 가지고 벽에 겸괘(謙卦)의 단상도(彖象圖)를 그려 놓고 스스로 ‘겸재’라 하였다.
몸과 집을 엄정하게 다스려 촌부(村婦)들의 경박한 행동이 있으면 노복을 시켜 한 우물을 먹지 못하게 하였고, 이웃사람 중에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그곳을 지날 때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처음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실정을 개탄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오로지 경사(經史)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불렸으나 사양하고 암천(巖泉)의 산재(山齋)에 살며 학문에만 힘썼다.
1662년(현종 3)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안계(安溪)로 그를 방문하여 앞서 조정에서 있었던 예론(禮論)을 토의한 뒤, 그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여 현종에게 아뢰어 후한 상을 하사하였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또한,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도수를 추정하여 시행되는 역법(曆法)을 시정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겸재집』이 있다.
부친은 하광국(河光國)이며, 모친은 강양이씨(江陽李氏)로 이광우(李光友)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고현(古賢)과 같이 되겠다는 큰 뜻을 가지고 벽에 겸괘(謙卦)의 단상도(彖象圖)를 그려 놓고 스스로 ‘겸재’라 하였다.
몸과 집을 엄정하게 다스려 촌부(村婦)들의 경박한 행동이 있으면 노복을 시켜 한 우물을 먹지 못하게 하였고, 이웃사람 중에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그곳을 지날 때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처음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실정을 개탄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오로지 경사(經史)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불렸으나 사양하고 암천(巖泉)의 산재(山齋)에 살며 학문에만 힘썼다.
1662년(현종 3)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안계(安溪)로 그를 방문하여 앞서 조정에서 있었던 예론(禮論)을 토의한 뒤, 그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여 현종에게 아뢰어 후한 상을 하사하였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또한,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도수를 추정하여 시행되는 역법(曆法)을 시정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겸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嶺南人物考
國朝人物考
嶺南人物考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성명 : "하홍도(河弘度)"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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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