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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원(沈之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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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지(源之)
호(號)만사(晩沙)
생년1593(선조 26)
졸년1662(현종 3)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송(靑松)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심설(沈偰)
저서『만사고(晩沙稿)』

[상세내용]

심지원(沈之源)
1593년(선조 26)∼1662년(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

부친은 감찰 심설(沈偰)이다.

1620년(광해군 12)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의 족조(族祖)인 심종도(沈宗道)가 대북파(大北派)인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었던 관계로 대북에 가까웠으나 대북의 정책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이듬해 검열에 등용된 뒤 저작겸설서(兼說書)정언부교리교리헌납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1630년(인조 8)에는 함경도안찰어사(咸鏡道按察御史)로 파견되어 호인(胡人)에게 매마매인(賣馬賣人)한 자를 적발하는 동시에 육진(六鎭)방어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함경도에서 돌아온 뒤에도 응교집의교리부수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노모 때문에 뒤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조익(趙翼)윤계(尹啓) 등과 의병을 모집하려 하였으나 윤계가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에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하였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되었다. 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1643년 그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로 기용되었으며, 164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뒤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효종초에는 대사간으로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갔으나 대사헌으로 돌아와 병조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652년(효종 3)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그의 아들 심익현(沈益顯)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사돈이 됨으로써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인 1653년에는 이조판서로서 국왕의 언행이 몹시 급함을 때때로 경계하였으며, 11월에는 정조사(正朝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4년 우의정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으로 옮겼으며, 1657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청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1659년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맡고 총호사(摠護使)로서 효종상례의 책임을 졌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왕대비(慈懿大王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좇으면서도 남인 조경(趙絅)을 적극 신구(伸救)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김홍욱(金弘郁)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하였다든가 강화설진(江華設鎭)을 반대하였다든가, 혹은 양역(良役)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족(士族)에 대한 수포(收布)에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겠다.

저서로는 『만사고(晩沙稿)』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과천의 정창연비(鄭昌衍碑)가 남아 있다. 영천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이미지]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