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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수(姜大遂)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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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강대진(姜大進)
자(字)면재(勉哉)
자(字)학안(學顔)
호(號)추간(秋磵)
호(號)한사(寒沙)
호(號)정와(靜窩)
생년1591(선조 24)
졸년1658(효종 9)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강익문(姜翼文)
합천이씨(陜川李氏)
저서『한사집』

[상세내용]

강대수(姜大遂)
1591년(선조 24)∼1658년(효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강대진(姜大進),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추간(秋磵)한사(寒沙)정와(靜窩).

사간 강익문(姜翼文)의 아들이며, 모친은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다.

여러 대에 걸쳐 합천에서 살았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10년(광해군 2) 생원‧진사시를 거쳐 161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사서(司書)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14년 광해군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자 정온(鄭蘊)이 간언하다가 유배되었는데, 그는 정온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평소에 반목하던 정인홍(鄭仁弘)의 모함으로 삭직당하고 회양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영변부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뒤 호조좌랑예조정랑에 올랐다. 다음해 사헌부정언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경세(鄭經世)를 따라서 영남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3월에 청나라와 화친하자 돌아와 사간주부를 지냈다.

1628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31년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이 되고, 이어 수찬부교리 겸 경연시독관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1637년 부응교를 지내고 1639년 통정대부가 되었으나, 1641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 진주에서 살다가 1644년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고, 이어 우승지병조참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1년 전주부윤이 되어 1년 동안 지낸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임금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관도에 오르지 않았다.

생시에 학문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석천서재(石泉書齋)를 지었으며, 또 유학자들을 위하여 이연서원(伊淵書院)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었다.

저서로는 『한사집』 7권 3책이 있다. 합천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人物考

[이미지]

[집필자]

이희권(李羲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