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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습(洪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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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홍익한(洪翼漢)
자(字)택원(澤遠)
호(號)화포(花浦)
생년1586(선조 19)
졸년1637(인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양(南陽[土])
활동분야문신
홍대성(洪大成)
생부홍이성(洪以成)

[상세내용]

홍습(洪霫)
1586년(선조 19)~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백승(伯升)‧택원(澤遠)이고, 호는 화포(花浦)이다. 다른 이른은 홍익한(洪翼漢)이다. 본관은 남양(南陽[土])이다.

증조부는 홍서주(洪敍疇)이고, 조부는 홍애(洪磑)이며, 부친은 홍대성(洪大成)이다. 생부는 홍이성(洪以成)이다. 외조부는 이선(李宣)이고, 처부는 허식(許寔)‧구곤원(具坤源)이다.

1615년(광해군 7) 식년시 생원 1등 2위에 합격하였으며, 1624년(인조 2) 공주정시 갑과 1위로 문과 장원 급제하였다. 관직은 고령현감(高靈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사은사서장관(謝恩使書狀官) 채유후(蔡裕後)가 평안도에서 병이 들어 사행을 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여,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에서 사은사 서장관으로 옮겨 차출되어, 중국에 사행(使行)을 갔다. 1625년(인조 3) 사은사(謝恩使) 이덕형(李德泂)‧부사(副使) 오숙(吳䎘)과 함께 귀국하는 길에, 선척(船隻, 사람이나 배 등을 싣고 나르는 물건)의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임의로 원역(員役) 30명을 중국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이 일로 논죄하라는 요구가 잇따라 있자, 국문(鞠問)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1626년(인조 4) 주청사(奏請使)로부터 당상역관(堂上譯官)이하에 이르기까지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는 하교가 있었다. 이에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1628년(인조 6) 고령현감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초병(抄兵)하는 능력이 부족하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한, 김육(金堉)에 의해 논죄(論罪)되어 파직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문헌]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