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최명길(崔鳴吉)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D5CBA85AE38B1586X0
자(字)자겸(子謙)
호(號)지천(遲川)
호(號)창랑(滄浪)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586(선조 19)
졸년1647(인조 25)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최기남(崔起南)
외조부유영립(柳永立)
저서『지천집』
저서『지천주차(遲川奏箚)』
공신호정사공신(靖社功臣)

[상세내용]

최명길(崔鳴吉)
1586년(선조 19)∼1647년(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1. 가계 및 관력
부친은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며, 모친은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 장원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국내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 사신 일행과의 접촉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간 복상(服喪)한 뒤 환로(宦路)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2. 호란의 대응자세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뒤 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함으로써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이로 인하여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 많은 지탄을 받았으며, 또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 인조의 생부, 뒤에 元宗으로 추존) 합부(合祔)에 따른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우참찬부제학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에 양관(兩館)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였고, 이에 조선에서는 절화(絶和)의 의논이 높아진 바, 그는 당장은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여 몇 년간은 무사할 수 있으나 종막(終幕)은 심히 우려된다고 하면서 또한 원망을 불러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1635년초 이조판서직을 면하고 몇 달 뒤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하여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싸워 지키거나 병화를 완화하는 어느 쪽도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채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도(江都)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면서 강력하게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해 겨울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12월에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는데,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해 정월에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진행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조선 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다는 사실은 시국에 대한 각기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3. 호란 후의 관력과 학문적 업적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아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 가을에 좌의정이 되고 다음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그 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하였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 임경업(林慶業) 등의 명나라와의 내통과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당하였고, 1645년에야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陽明學)을 독수(獨修)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우 장유나, 계자(系子) 최후량(崔後亮) 및 손자 최석정(崔錫鼎) 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는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 2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人物考
明谷集
藥泉集
昆侖集
西溪集
陽明學演論(鄭寅普, 薝園國學散藁, 1955)

[집필자]

이겸주(李謙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