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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金孝誠){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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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행원(行源)
생년1585(선조 18)
졸년1651(효종 2)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수연(金秀淵)
외조부김희룡(金希龍)

[상세내용]

김효성(金孝誠)
1585년(선조 18)∼1651년(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행원(行源).

부친은 양양부사(襄陽府使) 김수연(金秀淵)이며, 모친은 좌승지 김희룡(金希龍)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15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 하자 고부천(高傅川)김태우(金太宇) 등 24인과 함께 정조윤인이위경 등 3인의 목을 벨 것과 귀양가 있는 이원익(李元翼)을 다시 부를 것을 주청하였다가 길주(吉州)로 유배당하고 뒤에 진도로 이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과 함께 복관되어 의금부도사를 제수받고, 이어 청안현감(淸安縣監)이 되었다.

1625년 잠시 관직을 떠났다가 이듬해 호조좌랑에 올랐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왕비를 호가하였고, 1628년에 괴산현감(槐山縣監)면천군수(沔川郡守)를 역임하였다.

1634년 한성부서윤형조정랑군기시첨정 등 중앙으로 옮겨 있다가 이듬해 여산군수로 부임하였다. 이어 남원죽산부사공주청주목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 1) 청나라 사신 접대의 대책을 소홀히 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칠곡부사(漆谷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오랜 외직생활 동안 선정을 베풀어 청빈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또한, 무예에도 조예가 있어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위장을 맡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