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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李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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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장(子章)
호(號)탄옹(灘翁)
호(號)월탄(月灘)
시호(諡號)충정(忠貞)
생년1584(선조 17)
졸년1637(인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광정(李光庭)
처부유영경(柳永慶)

[상세내용]

이현(李𥙆)
1584년(선조 17)∼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장(子章), 호는 탄옹(灘翁) 혹은 월탄(月灘).

판서 이광정(李光庭)의 아들이며,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사위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시에 합격, 음보로 사과가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환로(宦路)에 들어섰으나 1612년 장인인 유영경이 대북파에 의하여 추죄될 때 삭직되어 10여년간 파산금양노량 등지에서 우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성균관전적으로 재서용되었고 이어 호조병조형조좌랑을 지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아버지 광정과 함께 천안으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인조를 호가하여 서울로 돌아온 뒤 예조정랑에 올랐으며, 곧 영평현감으로 나가 선치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625년(인조 3)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직강태복첨정을 거쳐 예빈시정으로 승차하였고, 정언장령문학을 두루 지낸 뒤 아버지가 병이 들자 사직하였다.

1629년 다시 정언을 제수받았으며, 1634년 순천부사로 나가 백성을 잘 다스려 가자되었고, 이어 공청도양전사(公淸道量田使)가 되었다. 동지사(冬至使)명나라에 다녀온 뒤 1636년 양서관향사(兩西管餉使)로 공을 세워 이듬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연안군(延安君)에 습봉되었으며, 곧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글씨로 당대에 이름이 높아 1630년 목릉지(穆陵誌)를 썼고 2년 후에는 국장도감(國葬都監)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大東野乘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