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추(朴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BC15CD94FFFFB1583X0 |
자(字) | 취지(就之) |
생년 | 1583(선조 16)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밀양(密陽) |
활동분야 | 문신 |

부 | 박효남(朴孝男) |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추(朴簉)
1583년(선조 16)~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취지(就之)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증조부는 박세정(朴世貞)이고, 조부는 박옹(朴顒)이며, 부친은 봉직랑(奉直郞) 행성환도찰방(行成歡道察訪) 박효남(朴孝男)이다. 외조부는 정희준(鄭希俊)이고, 처부는 조경인(曹景仁)이다. 동생으로 박서(朴遾)와 박천(朴𧂍)이 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1605년(선조 38) 증광시 진사 1등 3위로 합격하였고, 1615년(광해군 7) 식년시 병과 1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가주서(假注書)‧해운판관(海運判官)‧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해주목사(海州牧使)‧관향사(管餉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여절교위(勵節校尉)에 이르렀다.
1624년(인조 2) 해운판관 시절 고을에 계속해서 홍수와 가뭄이 들어 고을 백성이 전세(田稅)‧별수미(別收米)‧삼수미(三手米)를 제대로 낼 수 없자 보리로 대납하도록 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1625년(인조 3) 성균관에 모여 흉소(凶疏)에 서명한 성균관 유생들을 삭적(削籍)했던 조치를 풀어 신원해줄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1627년(인조 5) 해주목사 시절 파손된 전선(戰船)을 수리하지 않아 파직당할 처지에 놓였으나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당했으므로 파직이 잠시 미루어졌다. 같은 해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경증(李景曾)의 장계(狀啓)로 인해 인조로부터 표리(表裏) 1습을 하사받았다. 오숙(吳䎘)‧유희분(柳希奮)‧박승종(朴承宗)‧최유해(崔有海) 등과 함께 광해군 때의 팔학사(八學士)라는 비난을 받았다.
증조부는 박세정(朴世貞)이고, 조부는 박옹(朴顒)이며, 부친은 봉직랑(奉直郞) 행성환도찰방(行成歡道察訪) 박효남(朴孝男)이다. 외조부는 정희준(鄭希俊)이고, 처부는 조경인(曹景仁)이다. 동생으로 박서(朴遾)와 박천(朴𧂍)이 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1605년(선조 38) 증광시 진사 1등 3위로 합격하였고, 1615년(광해군 7) 식년시 병과 1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가주서(假注書)‧해운판관(海運判官)‧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해주목사(海州牧使)‧관향사(管餉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여절교위(勵節校尉)에 이르렀다.
1624년(인조 2) 해운판관 시절 고을에 계속해서 홍수와 가뭄이 들어 고을 백성이 전세(田稅)‧별수미(別收米)‧삼수미(三手米)를 제대로 낼 수 없자 보리로 대납하도록 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1625년(인조 3) 성균관에 모여 흉소(凶疏)에 서명한 성균관 유생들을 삭적(削籍)했던 조치를 풀어 신원해줄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1627년(인조 5) 해주목사 시절 파손된 전선(戰船)을 수리하지 않아 파직당할 처지에 놓였으나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당했으므로 파직이 잠시 미루어졌다. 같은 해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경증(李景曾)의 장계(狀啓)로 인해 인조로부터 표리(表裏) 1습을 하사받았다. 오숙(吳䎘)‧유희분(柳希奮)‧박승종(朴承宗)‧최유해(崔有海) 등과 함께 광해군 때의 팔학사(八學士)라는 비난을 받았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國朝文科榜目沙溪全書
仁祖實錄
仁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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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