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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성(康遇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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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581(선조 14)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외교 > 역관
강유경(康有慶)
저술『첩해신어(捷解新語)』

[상세내용]

강우성(康遇聖)
1581년(선조 14)∼미상. 조선 중기의 역관. 본관은 진주(晉州).

부친은 주교수(籌敎授)였던 강유경(康有慶)이다.

자세한 생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1592년 10월 진주성이 임진왜란으로 함락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왜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당시 12살이었던 그도 포로 속에 섞여 일본으로 끌려간듯하다. 주로 대판(大阪) 또는 경도(京都)부근에서 10년 동안의 억류생활을 보내었다.

1600년 9월 세키가하라전투(關ケ原戰鬪)가 일어났을 때에는 도쿠가와(德川家康)쪽에서 전투광경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으며, 1601년 6월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포로 중 남녀 250명이 송환되어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그도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듯하다.

그는 일본의 풍속을 잘 알고 있었으며 언어에도 능통하여, 1609년(광해군 1)에는 역과(譯科)의 왜학(倭學)에 합격하였으며, 전후 다섯 차례에 걸쳐 부산훈도(釜山訓導)에 임명되어 일본과의 통상외교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617년과 1624‧1636년 역관으로서 연속 세 차례나 일본에 다녀왔는데, 특히 첫번째와 두번째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데려오는 일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멀고 가까움을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닌 사실이 당시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뒤 품계가 가선대부에 이르렀으며, 저술로는 일본어학습서인 『첩해신어(捷解新語)』 10권을 남겼다. 이 책의 원고가 모두 완성되기는 1625년 이후 1636년 이전으로 추정되지만, 책이 실제로 간행된 것은 1676년이었다.

1678년부터는 이 책이 사역원 왜학의 과시용(科試用)교과서로 쓰였다.

[참고문헌]

通文館志
扶桑錄(李景稷, 海行摠載所收)
東槎錄(姜弘重, 海行摠載所收)
國語學史(姜信沆, 보성문화사, 1977)
捷解新語解題(森田武, 京都大學文學部編, 1957)
朝鮮語學史(小倉進平, 日本刀江書院, 1964)

[집필자]

송민(宋敏)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