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행립(曺行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D589B9BDB1580X0 |
자(字) | 백원(百源) |
호(號) | 태호(兌湖) |
생년 | 1580(선조 13) |
졸년 | 1663(현종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창녕(昌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인서(曺麟瑞) |
[상세내용]
조행립(曺行立)
1580년(선조 13)∼1663년(현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백원(百源), 호는 태호(兌湖). 도사 조인서(曺麟瑞)의 아들로, 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중에 큰아버지와 형제를 잃고, 이어서 광해군 때 정국의 혼란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서울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 있던 중,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빙고별제(氷庫別提)가 되었다. 이어서 활인서별제와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태인현감이 되어 이서(吏胥)들의 비리를 단속하여 관기를 바로잡았다.
그뒤 평시서령(平市署令)을 거쳐 익산군수‧온양군수를 차례로 지내고 군기시정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 영암에 내려가 향약을 제정, 향민들의 풍속순화에 힘썼다.
또한, 영암의 소화산(小華山)에 별당을 짓고 10여년간 독서하였으며, 뒤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영암의 구림사(鳩林祠)에 제향되었다.
임진왜란중에 큰아버지와 형제를 잃고, 이어서 광해군 때 정국의 혼란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서울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 있던 중,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빙고별제(氷庫別提)가 되었다. 이어서 활인서별제와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태인현감이 되어 이서(吏胥)들의 비리를 단속하여 관기를 바로잡았다.
그뒤 평시서령(平市署令)을 거쳐 익산군수‧온양군수를 차례로 지내고 군기시정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 영암에 내려가 향약을 제정, 향민들의 풍속순화에 힘썼다.
또한, 영암의 소화산(小華山)에 별당을 짓고 10여년간 독서하였으며, 뒤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영암의 구림사(鳩林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燃藜室記述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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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