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문(韓德文)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55CB355BB38B1578X0 |
자(字) | 성재(聖哉) |
생년 | 1578(선조 11) |
졸년 | 1627(인조 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주(淸州)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한언당(韓彦棠) |
[상세내용]
한덕문(韓德文)
1578년(선조 11)∼1627년(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성재(聖哉). 한언당(韓彦棠)의 아들이다.
1593년(선조 26) 조정에서 군대를 모으는 방편으로 무과를 빈설(頻設)하자, 16세의 나이로 종형(從兄) 억류(億瑠)와 함께 무과에 급제하고 싸움터로 나갔다.
왜란이 끝난 뒤 공로를 인정받아 수문장(守門將)‧훈련원봉사를 역임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북영장(北營將)으로 안주산성에서 청나라 군대를 막았는데, 힘껏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좌영장(左營將) 개천군수 장돈(張暾), 훈련원봉사 김언수(金彦守)‧함응수(咸應守) 등 12인과 함께 스스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1681년(숙종 7) 승지 정유악(鄭維岳)의 주청에 의하여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에서 순절한 충신들을 위한 충민사(忠愍祠)가 설립되자, 그는 그곳 동무(東廡)에 배향되고 이듬해 훈련원정에 추증되었다.
1593년(선조 26) 조정에서 군대를 모으는 방편으로 무과를 빈설(頻設)하자, 16세의 나이로 종형(從兄) 억류(億瑠)와 함께 무과에 급제하고 싸움터로 나갔다.
왜란이 끝난 뒤 공로를 인정받아 수문장(守門將)‧훈련원봉사를 역임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북영장(北營將)으로 안주산성에서 청나라 군대를 막았는데, 힘껏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좌영장(左營將) 개천군수 장돈(張暾), 훈련원봉사 김언수(金彦守)‧함응수(咸應守) 등 12인과 함께 스스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1681년(숙종 7) 승지 정유악(鄭維岳)의 주청에 의하여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에서 순절한 충신들을 위한 충민사(忠愍祠)가 설립되자, 그는 그곳 동무(東廡)에 배향되고 이듬해 훈련원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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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