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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응형(閔應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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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가백(嘉伯)
생년1578(선조 11)
졸년1662(현종 3)
시대조선중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호(閔護)

[상세내용]

민응형(閔應亨)
1578년(선조 11)∼1662년(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가백(嘉伯). 승지 민호(閔護)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한때 양근(揚根)으로 퇴거하였다가 1615년 승문원박사를 거쳐, 1621년 분병조정랑(分兵曹正郞)에 임명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지평(持平)정언(正言)장령(掌令)집의(執義)교리사간동부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 등을 두루 거치면서 때로는 시폐(時弊)를 극간(極諫)하고, 때로는 언로(言路)의 두색(杜塞)을 간하는가 하면 인조가 경연(經筵)을 전폐하자, 신진유신들이 국왕의 얼굴도 모른다고 유신들을 만나 대화할 것을 강력히 청하는 등 바른말을 서슴지 않아 이름이 있었다.

1643년(인조 21) 대사간이 되고, 곧 이어서 병조참의가 되어 최명길(崔鳴吉)김류(金瑬)심기원(沈器遠) 등 대신들을 탄핵하였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한때 추고(推考)되기도 하였다.

그뒤 다시 좌부승지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으로 임명되었을 때, 김류를 공척(攻斥)하다가 순천부사로 출보(出補)되었다.

그러나 인조김류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1646년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되어 순천에서 동작진(銅雀津)에 이르러 강빈(姜嬪)의 옥사(獄事)소식을 듣고 그 길로 입궐하여 강빈을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왕의 노여움을 크게 샀다. 이에 강빈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파직을 자청하고 벼슬을 떠났다.

1649년 인조의 노여움이 풀려 안변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부제학으로 돌아왔다.

그뒤 대사간부제학병조참판대사성대사헌예조참판이조참판공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면서 때로는 왕도(王道)를 설파하고, 때로는 당쟁의 폐를 논하고, 때로는 궁가설장(宮家設莊)의 폐(弊)를 극간하고 김육(金堉)의 경제정책에 도움을 주는 등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그의 논리가 공명정대하였기 때문에 군왕을 비롯하여 이해가 엇갈린 당인(黨人)들도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

1660년(현종 1) 공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우참찬이 되었다.

당시 윤선도(尹善道)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서인(西人)에 의하여 삼수(三水)로 귀양갔을 때 누구도 그의 무고함을 주장하지 못하였는데, 그는 윤선도의 무고함을 주장하여 서인의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으나 그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662년 85세의 나이로 우참찬에 있다가 죽었다. 그는 일생을 광해군인조효종현종에 역사하면서 직언으로 이름이 났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