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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元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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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원황(元鎤)
자(字)경명(警鳴)
생년1566(명종 21)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원주(原州)
활동분야문신
원경심(元景諶)

[상세내용]

원탁(元鐸)
1566년(명종 21)~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경명(警鳴)이고, 개명한 이름은 원황(元鎤)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증조부는 원희맹(元希孟)이고, 조부는 원응룡(元應龍)이며, 부친은 원경심(元景諶)이다. 처부는 오세현(吳世賢)이다.

1589년(선조 2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06년(선조 39) 식년시에 을과 1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좌윤(左尹)‧주서(注書)‧지평(持平)‧상주목사(尙州牧使)‧경상감사(慶尙監司)‧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곽재우(郭再祐)를 만나러 성주(星州)로 갔더니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갔다고 하여 그곳까지 가서 임금이 관직에 임명한다는 명을 전달하였으나 곽재우가 사양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이항복(李恒福)이 추천한 정협(鄭浹)이 역적이 되자 이항복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자 동참하지 않고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임실현감(任實縣監) 시절 임실에서 변란이 일어났으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고을을 편안하게 잘 다스린 사실을 인정받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발탁되었다. 1626년(인조 4)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재임하면서 청렴하게 고을을 잘 다스린 이유로 표리(表裏) 1벌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에 송사를 판결하던 중에 모욕을 당하게 되자 선비 이유도(李有道)를 곤창을 치게 하였다가 죽게 만들었다. 이 일로 파직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슬하에 아들 원진명(元振溟)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