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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행(李善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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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길(仲吉)
생년1576(선조 9)
졸년1637(인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의(全義)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경천(李慶千)
공신호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

[상세내용]

이선행(李善行)
1576년(선조 9)∼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중길(仲吉). 성천부사 이경천(李慶千)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태릉참봉에 제수되고,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가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세력을 숙청할 때 소북파로 몰려 삭직되어 10여년간 등용되지 못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봉교(奉敎)가 되고, 이어 성균관전적에 승진되었으며, 봉상판관(奉常判官)종묘령(宗廟令)광흥수(廣興守)를 거쳐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분조(分朝)에 호종하였다.

괴산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유효립(柳孝立)에 관계된 모역의 당을 잡아들인 공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오르고,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뒤 영암군수로 나갔다가 1632년 공조참의로 승진되었다. 그때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은 육로가 막혀서 뱃길을 이용하였는데 모두 가기를 꺼려하였지만 그만은 1년 만에 다녀왔다.

이듬해 회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임기를 무사히 마쳤으나 그 고을 사람들의 탄원으로 유임되었으며, 암행어사의 보고에 1등으로 뽑혀 상작(賞爵)을 받았으나 임지에서 죽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恬軒集(任相元)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대표명이선행(李善行)
선행(善行)
성명이선행(李善行)
중길(仲吉)

명 : "선행(善行)"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公眼自在v6竊惜之上答以任徵夏事其言旣妄則投畀之典烏可已乎○正言閔應洙疏略曰趙顯命之疏指意近於宛轉辭語微有典折比善行輩稍若有間而以臣愚見其可駭可惡者反有甚者噫愛戴吾君同出秉彝而顯命則乃曰贊之薄之因其利害而爲之言之無倫
公眼自在v6呈一疏而不過如日昨權扶李善行輩疏語何以爲之傳曰勿爲捧入執義李端章請還收徵夏遠竄之命●正言尹涉啓曰日昨善行遠竄之後以更提此事則繩以不道之律特下備忘乃者吳命恒李麟徵李萬選等輕視王言不有國法各率徒黨復襲善行之凶
公眼自在v6日昨善行遠竄之後以更提此事則繩以不道之律特下備忘乃者吳命恒李麟徵李萬選等輕視王言不有國法各率徒黨復襲善行之凶說敢肆跳踉請幷命極邊遠竄趙顯命之疏外事閃弄內藏機巧用意之奸回造辭之陰慝十手難掩畢露無餘噫嘻渠於平
公眼自在v6臣之義幼學李舜欽五十餘人等疏請徵夏凶悖之罪備忘記日昨任徵夏之疏拈出下批者無他意責其妄言也先有權扶次有善行又有儒疏自以爲一機迭相投疏其意不專在於徵夏噫是非徵夏誣之也實渠輩爲之也疏頭李善行極邊遠竄疏儒李舜欽遠
國朝人物志v3慶千子宣祖癸卯進士丁未登文科爲檢閱時鄭仁弘力詆領相柳永慶謀危東宮竝論其爲黨者善行亦被涅未幾光海卽位仁弘持論益急戮柳相尸善行亦被坐黜十餘年光海大治宮室募人能入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