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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覺性)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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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징원(澄圓)
호(號)벽암(碧巖)
생년1575(선조 8)
졸년1660(현종 1)
시대조선중기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조씨(曺氏)
출생지서삼산(西三山)
저서『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저서『간화결의(看話決疑)』
저서『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저술『도중결의(圖中決疑)』
저술『참상선지(參商禪旨)』

[상세내용]

각성(覺性)
1575년(선조 8)∼1660년(현종 1). 선승(禪僧)‧승병장(僧兵將). 성은 김씨, 자는 징원(澄圓), 호는 벽암(碧巖). 각성은 법명이다.
1. 탄생 및 출가수행
모친은 조씨(曺氏)이며, 12월에 충청북도 보은서삼산(西三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북두칠성께 기도하여 백발노인으로부터 거울을 받아 지니는 꿈을 꾼 뒤에 낳았다.

9세에 아버지가 죽자 출가를 결심하고 10세에 출가하여 설묵(雪黙)의 제자가 되었으며,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후 불경을 공부했다.

그뒤 선수(善修)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 속리산덕유산가야산금강산 등의 명산에서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 가야산에 있을 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城)은 “불도징(佛圖澄)도안(道安)을 해외에서 다시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뒤 스승과 함께 지리산으로 옮겨 ‘삼걸(三傑)’로 널리 알려졌던 충휘(冲徽)태능(太能)응상(應祥) 등과 함께 수행하였다.

이때 그는 많은 시게(詩偈)를 남겨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대한 뛰어난 지식을 나타냈다.
2. 행적
1600년에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에서 스승의 뜻에 따라 강석(講席)을 열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제자들에게 항상 “생각이 망령되지 않아야 하고, 얼굴에 부끄러움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되며, 허리를 구부려 앉지 않아야 한다[思不妄面不愧腰不屈].”는 3가지 계로써 일깨웠다.

1612년에 선수가 광승(狂僧)에게 무고를 입어 투옥되자 그도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그러나 광해군이 직접 치죄하다가 그의 덕에 감복되어 하사품을 내리고 방면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부휴각성을 대불과 소불이라 지칭하였다.

또한, 광해군봉은사에 머물게 하고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의 직함을 내렸고, 그곳에서 많은 사대부와 교유를 갖게 되었으며, 특히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가까이 지냈다.

1615년 지리산 칠불암으로 옮겼고, 1616년 다시 신흥사(新興寺)로 옮기자 7백인의 대중이 모여왔으므로 밤중에 태백산 전천동(箭川洞)으로 은거하였다.

1617년 광해군청계사(淸溪寺)에서 큰 재를 열었을 때 설법을 하였으며,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이에 나라에서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함과 함께 의발을 하사하여 그 공을 치하하였다.

1632년에는 화엄사를 중수하여 대총림으로 만들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전국사찰에 ‘총궐기하여 오랑캐를 쳐부수자. ’는 격문을 보냈다. 의승군 3천명이 모이자 이를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 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면서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났으므로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때 후학들을 위해서 『도중결의(圖中決疑)』『참상선지(參商禪旨)』 등을 저술하였다.

1640년 봄에 쌍계사(雙溪寺)를 중수하였고, 그해 8월에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 원두표(元斗杓)의 청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직을 맡아서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는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1641년 해인사로 가서 머물 때, 조정에서는 각성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서울로 향하던 도중 병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백운산 상선암(上仙庵)에 머물렀으며, 1642년 보개산으로 들어가서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이때 왕자였던 효종은 그를 만나 화엄종지(華嚴宗旨)를 배웠다.

1646년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熙彦)과 은거하였고, 희언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가서 지내다가 제자들에게 ‘도업(道業)에 힘써 국은에 보답할 것’과 ‘사후에 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한 뒤 입적하였다. 나이 86세, 법랍 73세였다.
3. 업적
대표적인 제자로는 수초(守初)처능(處能)이 있으며, 문하의 제자들이 취미파(翠微派)‧백곡파(白谷派)‧침허파(枕虛派)‧고운파(孤雲派)‧동림파(東林派)‧연화파(蓮花派)‧벽천파(碧川派) 등의 7파를 세워서 그의 선법을 크게 전파하였다. 그는 수행에 통달하였고, 원융무이(圓融無二)한 이념의 한국불교 전통성을 깊이 익혀 정혜쌍수(定慧雙修)‧교관겸수(敎觀兼修)를 실천하였으며, 무자간화선(無字看話禪)을 크게 중요시하고 화엄사상에도 해박하였다.

특히, 문도들을 가르칠 때 ‘참되고 깨끗하고 굳세게’라는 삼잠(三箴)으로써 지침을 삼아 교육하였는데, 이것은 휴정(休靜)이 불교계의 장래를 염려하여 선수에게 부탁하였던 ‘기강의 재정돈’을 이어받아 구체적으로 이행한 것이다.

저서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간화결의(看話決疑)』『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가 있으며, 스승의 시문집인 『부휴당집(浮休堂集)』 5권을 편찬하였다.

[참고문헌]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韓國佛敎思想史(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論叢, 1975)

[이미지]

[집필자]

김위석(金渭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