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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황(尹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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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요(德耀)
호(號)팔송(八松)
시호(諡號)문정(文正)
생년1571(선조 4)
졸년1639(인조 17)
시대조선중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창세(尹昌世)
저서『팔송봉사(八松封事)』

[상세내용]

윤황(尹煌)
1571년(선조 4)∼1639년(인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 윤창세(尹昌世)의 아들이며, 윤전(尹烇)의 형이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1599년 주서로 입시한 뒤 군자감첨정성균관전적을 거쳐, 1601년에 감찰이 되었으며 곧 정언으로 옮겼다. 홍문관은 중요한 부서이므로 은상(恩賞)으로 사사로이 임명할 수 없다는 것과, 척신의 직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후 병조예조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북청판관으로 나갔다.

1608년(광해군 즉위) 북청판관으로 성가한 자제를 거느리고 관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며,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시골에 은거하였다.

1626년(인조 4) 사간보덕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화(主和)를 반대,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 주화론자의 유배를 청하고, 항장(降將)은 참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주화는 항복이라고 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탈관직되어 유배의 명을 받았으나 삼사의 구원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 이듬해 다시 사간이 되었고 길주목사안변부사사성승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5년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때 전란으로 어려워진 백성의 구급책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이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묘호란 때와 같이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집의 채유후(蔡裕後), 부제학 전식(全湜)의 탄핵을 받았는데 특히 전식은 그가 부의(浮議)로 오국(誤國)한 죄를 청하자, 인조 또한 “부박(浮薄)한 풍습은 통렬히 징치하지 않을 수 없어 이에 죄를 정한다.” 하여,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나와 죽었다.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는 평을 들었다. 영광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팔송봉사(八松封事)』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國朝榜目
典故大方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