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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돈(沈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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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심열(沈悅)
자(字)학이(學而)
호(號)남파(南坡)
시호(諡號)충정(忠靖)
생년1569(선조 2)
졸년1646(인조 24)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송(靑松)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심충겸(沈忠謙)

[관련정보]

[상세내용]

심돈(沈惇)
1569년(선조 2)∼1646년(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부친은 서인의 영수인 심의겸(沈義謙)의 아우이자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비)의 동생인 충익공호성공신2등(忠翼公扈聖功臣二等) 청림군(靑林君) 심충겸(沈忠謙)이다. 1593년(선조 26)년 계사전주별시문과(癸巳全州別試文科)에 병과 1등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본명은 심열(沈悅)이었는데 1613년(광해군 5) 유영경(柳永慶)의 아들 유열(柳悅)이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심돈(沈惇)으로 개명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 유영경이 신원(伸寃)되자 복구명소(復舊名疏)를 내고 옛 이름을 되찾았다.

1614년(광해군 6) 안동부사(安東府使), 1615년 경상감사(慶尙監司)를 거쳐 1616년(광해군 7) 선수도감제조(繕修都監提調)에 특제되었으며, 그해 시책문서사관(諡冊文書寫官)으로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그해 또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고, 그해 선수도감제조로 인왕산(仁王山) 아래의 인경궁(仁慶宮) 공사를 맡아보아 초피(貂皮)와 모엄(帽掩) 1부씩을 하사받았다.

이듬해에는 보배진제주관(寶陪進題主官)으로 가자(加資)되었고, 1618년 정청(庭請)에 행동지(行同知)로서 참가하였다. 1619년 함경감사(咸鏡監司)가 되었는데, 이때 곰을 잡은 것까지 일일이 보고하여 양사(兩司)의 비난을 받았다. 1624년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는데, 세가명경(世家名卿)으로 시세에 아부하여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가 되었다고 비난하는 사론(士論)이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하여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바꾸어 나갔다.

심돈인조정권에서도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까지 상당기간 호조판서(戶曹判書)로 활동하면서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청나라가 요구하는 공물 등을 마련하는데 수완을 발휘하였다.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등을 두루 거치고 영의정(領議政)까지 올랐지만 일생동안 폐모정청(廢母聽政)에 참여했던 전력의 굴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사후 종증손(從曾孫) 조원기(趙遠期)가 유문(遺文)을 수습하여 임의백(任義佰)의 발문을 받아 『남파집(南坡集)』을 간행하였다.

내용은 서문(序文)이나 잡저(雜著)에 해당하는 글은 보이지 않고 시‧소차(疏箚)‧서장(書狀) 등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문집으로서의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는 못했지만 본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각종 사직소와 시무차자(時務箚子) 등은 광해군인조 연간의 정치‧사회‧경제적 현안들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大東野乘
서울대학교 규장각

[집필자]

오윤정
대표명심돈(沈惇)
시호충정(忠靖)
학이(學而)
남파(南坡)

시호 : "충정(忠靖)"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