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박동량(朴東亮)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C15B3D9B7C9B1569X0
자(字)자룡(子龍)
호(號)기재(寄齋)
호(號)오창(梧窓)
호(號)봉주(鳳洲)
시호(諡號)충익(忠翼)
생년1569(선조 2)
졸년1635(인조 13)
시대조선중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응복(朴應福)
저서『기재사초』
저서『기재잡기(寄齋雜記)』
저서『방일유고(放逸遺稿)』
공신호호성공신(扈聖功臣)

[상세내용]

박동량(朴東亮)
1569년(선조 2)∼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오창(梧窓)봉주(鳳洲).

대사헌 박응복(朴應福)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 있게 하여 대중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하였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해 동부승지좌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하여 황해도 수안(遂安)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다. 이어 연안부사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도 전란 뒤의 민생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하고, 1611년(광해군 3)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일찍이 선조 때부터 한응인(韓應寅)유영경(柳永慶)서성(徐渻)신흠(申欽)허성(許筬)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7신의 한 사람으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1612년 김직재무옥사건(金直哉誣獄事件)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으로 있던 그가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 하다가 더욱 미움을 받아, 그뒤 자주 탄핵을 당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해 계축옥사 때 모반혐의로 심문을 받다가 혐의가 희박하여 극형은 받지 않았는데, 이때 반역관계는 극구부인하면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 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은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계축옥사 때 유릉저주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인해서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충원으로 옮겨지고, 1632년(인조 10) 전리에 방귀되었다.

뒤에 아들 박미(朴瀰)박의(朴漪)의 상언(上言)으로 복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와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기재사초』『기재잡기(寄齋雜記)』『방일유고(放逸遺稿)』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寄齋史草
癸亥靖社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용국(金龍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