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유희발(柳希發)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20D76CBC1CB1568X0
자(字)인초(軔草)
생년1568(선조 1)
졸년1623(인조 1)
시대조선중기
본관문화(文化)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자신(柳自新)
조부유잠(柳潛)
증조부유수천(柳壽千)
외조부정유길(鄭惟吉)

[상세내용]

유희발(柳希發)
1568년(선조 1)∼1623년(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인초(軔草). 유수천(柳壽千)의 증손으로, 조부는 유잠(柳潛)이고, 부친은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유자신(柳自新)이며, 모친은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일찍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해 1605년(선조 38) 세자익위사사어로 세자를 보필하고, 이듬해 재령군수로 부임하였다. 군수로 재직중이던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광해군의 처남인데다 당시 조카 유효립(柳孝立: 希鏗의 아들)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해 논란이 일었다.

1610년(광해군 2) 안산군수로 옮겼다가, 정언문학지평 등을 역임한 뒤, 이듬해 홍문관부교리사헌부헌납예조정랑사헌부지평을 거쳐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조정랑 의망(擬望: 3인의 후보자를 왕에게 추천함)시 4품의 위치였기에 낭천(郎薦: 전랑의 추천)이 막혔으나, 외척세력에 영합한 정랑 이후(李厚)의 적극 천거로 제수(除授)되었고, 유씨 자제들이 차례로 전당에 의망되어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1612년(광해 4) 직강권필(權韠)을 시 내용을 문제삼아 무고로 유배케 하였다. 1615년(광해 7)에는 광해군 생모 공빈김씨(恭嬪金氏)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追崇)하기 위해 설치한 존숭도감낭청(尊崇都監郞廳)으로 일하였다.

그 뒤 전한응교직제학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이조참의이이첨(李爾瞻) 등이 적극 발의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가담하였다.

그 뒤 동지의금부사이이첨 등과 함께, 허균(許筠)의 심복들이 남대문에 격문을 붙여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이유로, 정적 허균(許筠)을 능지처참케 하였다. 그 뒤 사포서제조, 겸동지경연을 역임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의 형 유희분(柳希奮)과 함께 주살(誅殺)되었으며, 자손들은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와 형 유희분 모두 광해군 폐비유씨의 형제로서, 형은 소북인데 반해, 그는 대북이어서 서로 사이가 나빴다. 그러나 임해군(臨海君)영창군(永昌君)진릉군(晉陵君)능창군(綾昌君)의 화는 모두 이들의 모의 때문이었다.

유희분이 그의 눈먼 아들의 혼사를 구하였으나 모두 허락지 않았는데, 한사덕(韓師德)이 권세가인 유희분과의 결탁을 위해 유희분의 집안에 딸을 보냈다가 인조반정 후 탄핵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黎室記述
大東野乘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