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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우(梁慶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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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점(子漸)
호(號)점역재(點易齋)
호(號)요정(蓼汀)
호(號)태암(泰巖)
생년1568(선조 1)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원(南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양대박(梁大樸)
조부양의(梁艤)
증조부양자윤(梁自潤)
저서『제호집(霽湖集)』

[상세내용]

양경우(梁慶遇)
1568년(선조 1)∼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자점(子漸), 호는 제호(霽湖)점역재(點易齋)요정(蓼汀)태암(泰巖).

증조부는 양자윤(梁自潤)이고, 조부는 집의(執義) 양의(梁艤)이고, 부친은 의병장 양대박(梁大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1592년(선조 25)에 부친을 따라 아우 양형우(梁亨遇)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또 고경명(高敬命)의 막중(幕中)에 나아가서 서기(書記)가 되었다. 1595년(선조 28)에 명군(明軍)의 군량 조달을 위해 「고도내모속문(告道內募粟文)」이라는 격문(檄文)을 지어 도내에 곡식을 모집하자 10일 만에 7,000여 석이 모이니,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탄복하였다. 그리하여 명군이 도사(都事)를 통해 포계(褒啓)하여 상전(賞典)을 주려 하자 부친 양대박(梁大樸)을 증직해 줄 것을 원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1597년(선조 30) 참봉(參奉)으로 정유별시문과(丁酉別試文科) 병과(兵科) 13등으로 급제하여 죽산현감(竹山縣監) 등을 지냈다. 1606년(선조 39) 조사(詔使) 주지번(朱之蕃), 양유년(梁有年)이 나오자 원접사 유근(柳根)종사관으로 차출되었다. 1609년(광해군 1)에 차천로(車天輅) 등과 함께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의주(義州)에 갔으나 폐단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박응서(朴應犀)의 고변으로 조희일(趙希逸)최기남(崔起南) 등과 함께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1616년(광해군 8)에 병진중시문과(丙辰重試文科)에 병과 4등으로 뽑히고 장성현감(長城縣監)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대비(大妃)의 폐서인(廢庶人) 문제로 아우인 양형우(梁亨遇)가 항소(抗疏)하여 유배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제암(霽巖)에 집을 지어 고슬당(鼓琴堂)이라고 부르며 제호(霽湖)로 호(號)를 삼았다. 그 해 가을 명나라후금(後金)의 침략으로 원군을 요청해오자 북방을 위한 공어방략(攻禦方略) 20책(策)을 관서병사(關西兵使)에게 올렸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1623년(인조 1)에 김류(金瑬)가 반정(反正)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하고 금강(錦江)으로 돌아갔다. 저서로 『제호집(霽湖集)』이 있는데, 양경우의 손자인 양도(梁燾)가 1647년(인조 25)에 간행했다. 이 문집은 모두 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1∼4에는 시 450수가 오언시‧칠언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5에는 의병활동 당시의 기록을 일기체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권6에는 시의 형식에 대한 비편, 권7에는 지리산 기행록, 권8에는 잠(箴)‧비문‧기(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1796년(정조 20)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증직되고 부자충의지문(父子忠義之門)이란 이름으로 정문(旌門)이 내려졌고, 호남관찰사에게 양경우의 문집을 간행하라고 명했다. 1799년(정조 23) 양경우의 문집에 부친 양대박『청계집(靑溪集)』과 동생인 양형우『동애집(東崖集)』과 함께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로 합편되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韓國文集叢刊解題
東崖集
梁大司馬實記

[집필자]

김영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