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의(愼汝誼)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2E0C5ECC758B1567X0 |
자(字) | 사선(士善) |
호(號) | 매당(梅堂) |
생년 | 1567(명종 22) |
졸년 | 1649(효종 1)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거창(居昌)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신원개(愼元凱) |
처 | 함평이씨(咸平李氏) |
처부 | 이유회(李惟誨) |
묘소 | 영암(靈巖) 사곡(槎谷) |

[상세내용]
신여의(愼汝誼)
1567년(명종 22)∼1649년(효종 1).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사선(士善).
통례(通禮) 신후경(愼後庚)의 후예이고, 감사(監司) 신기(愼幾)의 6세손이며, 부친은 봉사(奉事) 신원개(愼元凱)이다. 부인은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생원 이유회(李惟誨)의 딸이며, 동생으로는 유학(幼學) 신여훈(愼汝訓)‧신여원(愼汝謜)‧신여눌(愼汝訥)이 있다.
25세 때인 1591년(선조 24)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20위로 합격하였다. 벼슬은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선공참봉(繕工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亂)에 창의(倡義) 근왕(勤王)한 일이 모의록(募義錄)에 기재되어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丙子)에 동생 신여원‧신여눌과 창의하여 금산(錦山)에 이르러 화성(和成)을 듣고는 파(罷)하여 돌아간 후 두문(杜門)한 채 일생을 마쳤다.
조정에서 그 일을 가상히 여겨 그의 아들 신령(愼昤)을 금부도사(禁府都事)에 들어 썼다.
묘지는 영암(靈巖) 사곡(槎谷)에 대등(大嶝) 과협(過峽) 자좌(子坐)에 있다.
통례(通禮) 신후경(愼後庚)의 후예이고, 감사(監司) 신기(愼幾)의 6세손이며, 부친은 봉사(奉事) 신원개(愼元凱)이다. 부인은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생원 이유회(李惟誨)의 딸이며, 동생으로는 유학(幼學) 신여훈(愼汝訓)‧신여원(愼汝謜)‧신여눌(愼汝訥)이 있다.
25세 때인 1591년(선조 24)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20위로 합격하였다. 벼슬은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선공참봉(繕工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亂)에 창의(倡義) 근왕(勤王)한 일이 모의록(募義錄)에 기재되어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丙子)에 동생 신여원‧신여눌과 창의하여 금산(錦山)에 이르러 화성(和成)을 듣고는 파(罷)하여 돌아간 후 두문(杜門)한 채 일생을 마쳤다.
조정에서 그 일을 가상히 여겨 그의 아들 신령(愼昤)을 금부도사(禁府都事)에 들어 썼다.
묘지는 영암(靈巖) 사곡(槎谷)에 대등(大嶝) 과협(過峽) 자좌(子坐)에 있다.
[참고문헌]
靈光邑誌
朝鮮人名辭書
한국족보자료시스템(http://jokbo.skku.edu)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朝鮮人名辭書
한국족보자료시스템(http://jokbo.skku.edu)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집필자]
김동섭
성명 : "신여의(愼汝誼)"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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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