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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명(鄭宗溟)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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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조(士朝)
호(號)화곡(華谷)
호(號)벽은(薜隱)
생년1565(명종 20)
졸년1626(인조 4)
시대조선중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철(鄭澈)
문화 유씨(文化柳氏)
처부홍인걸(洪仁傑)
외조부유강정(柳强頂)

[상세내용]

정종명(鄭宗溟)
1565년(명종 20)∼1626년(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조(士朝), 호는 화곡(華谷)벽은(薜隱).

부친은 좌의정(左議政)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고, 모친은 문화 유씨(文化柳氏)유강정(柳强頂)의 딸이며, 형조참의 홍인걸(洪仁傑)의 사위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2년 7월 의주행재소에서 실시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에 초수(超授)되고 곧이어 예조좌랑에 개수(改授)되었다.

1594년에 전년에 동인의 모함으로 강화에 퇴거하였다가 죽은 아버지의 죄를 추론하면서 관작을 추탈하자 이를 항변하다가 삭출되었다.

이후 인조가 즉위하기까지 20여년에 걸쳐 아버지에 대한 선조의 혐오와 동인과 대북의 박해 및 성혼을 극력으로 배척한 정인홍(鄭仁弘)의 집요한 음모 등으로 사환(仕宦)이 금지당함은 물론 생명이 위협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1623년(인조 1) 3월 인조의 즉위에 따른 서인의 집권과 함께 성균관직강으로 복직되고, 이듬해 3월 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司諫院司諫兼春秋館編修官)을 거쳐 곧 사도시정(司䆃寺正)에 개수되었다.

그해 5월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재직할 때에 동생 홍문관교리 정궁명(鄭弓溟)과 함께 아버지가 죄를 입게 된 것은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다스리면서 동인을 배척하였기 때문이니 관작을 복구하여 달라고 간청하여 아버지의 관작을 복구시켰고, 그해 7월 사헌부집의사간원사간사복시정을 역임하였다.

1625년 의정부검상의정부사인홍문관교리세자시강원보덕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면서 강릉대도호부사로 파견되었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작으로는 『송강유고(松江遺稿)』의 부록에 실려 있는 『백씨유고(伯氏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이미지]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