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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鄭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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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방로(邦老)
호(號)수남방옹(水南放翁)
생년1563(명종 18)
졸년1640(인조 18)
시대조선중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학 > 시‧시조인
정금암(鄭金嚴)
조씨부인(趙氏夫人)
외조부조영(趙瑛)

[상세내용]

정훈(鄭勳)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방로(邦老), 호는 수남방옹(水南放翁). 본관은 경주(慶州)(주1)
본관
디지털 남원문화대전을 참고하여 본관을 경주(慶州)로 추가함.
.

고려대제학을 지낸 정현영(鄭玄英)의 후손이며, 부친은 효도로 당대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능참봉 정금암(鄭金嚴)이고, 모친은 옥천조씨 조영(趙瑛)의 딸인 조씨부인(趙氏夫人)으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전형적 양반집안에 태어났으나 관직에 나간 바 없이 일생을 마쳤다. 형이 요사한 탓으로 부모들이 명이나 길라 하여 수학의 기회를 주지 않아서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남원 동문 밖에서 초야에 묻혀 살면서 77세의 일생을 보냈다. 임진왜란‧인조반정‧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비록 정계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시대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강직하고 정의를 제일로 내세우던 적극적인 성품으로 불의를 좌시하지 못하였던 까닭에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모병, 출동하였던 일이 있고, 정묘‧병자 두 차례의 호란 때에는 노경에 이르러 스스로 출정하지 못하게 되자 아들을 대신 출정시킬 만큼 우국지성이 놀라웠다.

이러한 강한 국가의식은 그의 가사작품 「성주중흥가(聖主中興歌)」와 시조작품 일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계해반정후계공신가(癸亥反正後戒功臣歌)」‧「탄오성한음완평찬적가(歎鰲城漢陰完平竄謫歌)」‧「탄강도함몰대가출성가(歎江都陷沒大駕出城歌)」‧「탄북인작변가(歎北人作變歌)」‧「민여임청백찬가(閔汝任淸白讚歌)」 등도 모두 다 동류의 시조작품이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대신 생활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탐승하며 그 심회를 시가로 엮어냈다. 「수남방옹가(水南放翁歌)」‧「용추유영가(龍湫遊詠歌)」 등의 가사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상을 작품화한 시가로는 「탄궁가(歎窮歌)」‧「우활가(迂闊歌)」 등의 가사작품과 「자경(自警)」‧「기우인(寄友人)」‧「곡처(哭妻)」 등의 시조가 있다. 그의 시가작품은 시어선택이나 조사 면에서 독창적인 데가 있으며, 섬세한 예술적 관찰력과 대담한 자기의식 노출은 개성있는 시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다.

특히 시가작품의 군데군데에 보이는 대담한 고발부분들은 당시 여타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문필유산은 국문학작품으로 가사 5편과 시조 20편이 있고, 한시문도 30여편이 있다.

[참고문헌]

水南放翁遺稿
鄭勳과 그의 詩歌攷(朴堯順, 崇田語文學 2, 1973)

[집필자]

박요순(朴堯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