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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식(全湜)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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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정원(淨遠)
호(號)사서(沙西)
시호(諡號)충간(忠簡)
생년1563(명종 18)
졸년1642(인조 20)
시대조선중기
본관옥천(沃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전여림(全汝霖)

[상세내용]

전식(全湜)
1563년(명종 18)∼1642년(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증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의 아들이다. 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익남(金益南)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7년 전적예조좌랑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하여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뒤 예조참의예조참판에 제수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하여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하였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님을 들어 이를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에 가계(加階)되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增補文獻備考
凝續雜錄
凝川日錄
黙齋日記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