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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취정(任就正)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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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진화(進和)
생년1561(명종 16)
졸년1628(인조 6)
시대조선중기
본관풍천(豊川)
활동분야관료 > 권신

[상세내용]

임취정(任就正)
1561년(명종 16)∼1628년(인조 6). 조선 중기의 권신(權臣).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진화(進和).

1589년(선조 22)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가 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사관(史官)이었던 주서 박정현(朴鼎賢), 검열 조존세(趙存世)김선여(金善餘) 등 4인과 모의하여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도망한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선조가 환조(還朝)한 뒤에 관직에 나가기 위하여 애를 썼으나 겨우 외직에 수차 임용되었을 뿐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그뒤 1599년 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1604년 서산군수를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원주부사에 임명되었고, 광해군 재위 때에 그의 형 임수정(任守正)의 첩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1613년 형조참의, 1616년 좌승지, 1620년 이조참판동지경연(同知經筵), 1621년 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파직되었으며, 그뒤 1628년 임경후(任慶後)박동기(朴東起)이종충(李宗忠)오현(吳玹)이후강(李後崗)안대홍(安大弘)고경성(高景星) 등과 함께 광해군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인조실록』의 기록에는 그가 궁액(宮掖)의 세를 빙자하여 권병(權柄)을 농단하고 탐욕스럽기가 그지없어 광해군 때의 권세가였던 이이첨(李爾瞻)과 대등하였다고 한다.

1617년 대북파로서 폐모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