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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金尙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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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택(景擇)
호(號)풍계(楓溪)
호(號)계옹(溪翁)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561(명종 16)
졸년1637(인조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관료 > 상신
김극효(金克孝)
외조부정유길(鄭惟吉)
출신지서울

[상세내용]

김상용(金尙容)
1561년(명종 16)∼1637년(인조 15). 조선 인조 때의 상신(相臣)이며,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서울 출신.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의 아들이며,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형,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 선원촌(江華仙源村: 지금의 江華郡 仙源面 冷井里)으로 피난했다가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종사관이 되어 왜군토벌과 명나라군사 접대에 공을 세움으로써 1598년 승지에 발탁되고, 그뒤 왕의 측근에서 전란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하면서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로 출보(黜補), 이후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 잠시 한성우윤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머물렀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했다. 인조반정 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예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1630년(인조 8)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늙음을 이유로 바로 사퇴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일찍이 외할아버지인 정유길에게서 고문(古文)과 시를 배웠고, 성혼(成渾)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황신(黃愼)이춘영(李春英)이정귀(李廷龜)오윤겸(吳允謙)신흠(申欽) 등과 친밀했으며, 당색이 다른 정경세(鄭經世)와는 도학으로써 사귀었다.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면서 인조초에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갈리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체는 2왕(二王: 晉의 王羲之‧王獻之 父子)의 필법을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평양의 숭인전비(崇仁殿碑) 및 풍덕군수(豊德郡守) 장인정(張麟禎)의 비에 전액(篆額)을 남기고 있다.

시조로 「오륜가(五倫歌)」 5장,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9편이 전한다. 한때 그의 죽음을 놓고 자분(自焚)이 아니라 실화(失火)때문이라는 이설이 있었으나, 박동선(朴東善)강석기(姜碩期)신익성(申翊聖) 등의 변호로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1758년(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화 충렬사(忠烈祠),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안변 옥동서원(玉洞書院),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선원유고』 7권이 전하고, 판본은 안동 봉정사(鳳停寺)에 보관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海東名臣傳(金堉)
國朝人物考
仙源遺稿

[집필자]

정만조(鄭萬祚)

호 : "선원(仙源)"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1金尙容克孝子鄭惟吉外孫明宗辛酉生字景擇號仙源壬辰亂避兵于仙源仍以自號又楓溪又溪翁成渾門人宣祖壬午司馬居賢館抗疏論國事庚寅以宣陵參奉登增廣歷翰林銓
國朝捷錄v01字公世辛卯拜左大成方行子副學時燦孫仙源六代孫文貞公魚錫定女壻本安東
國朝捷錄v01善篆吏判仙源
國朝捷錄v01淸陰丁丑斥和囚於瀋獄不屈生還仙源
國朝人物志v2字景澤號仙源安東人掌令璠曾孫少游牛溪成渾門受業宣祖壬午進士庚寅文科選入史局壬辰爲體察使
國朝人物志v3志上疏請斬蒙古使是冬淸人大擧來寇益兼奉母徐氏入江都與權順長等爲死守計及事急與仙源金尙容自焚于南城翌日母徐氏亦引決贈領議政諡忠烈上同
國朝人物志v3進士甲子文科自號萬癡官至掌令師事沙溪金長生丙子冬入江都淸人渡江與洪參議命亨從仙源金尙容在南樓金公將立慬麾諸人避之秀南曰職秩雖有尊卑之分人臣均有死國之義遂與同死死時寄其妻書曰
國朝人物志v3別提李适反時稷扈駕公州陞授正言丙子冬痛哭入江都謂人曰是吾死所丁丑正月淸人渡江仙源金尙容自焚死宋時榮尹烇與之同舍時稷曰吾儕不古人書今日尙可生乎作家書付家奴以寄其子
國朝人物志v3字一卿號歸川韓山人府使穧子慶流孫仁祖己卯進士文科壯元仙源金尙容以宗伯課試童蒙一見奇之曰可妻也遂以子參判光炫女歸之爲校理疏論金弘郁之冤
朝鮮科宦譜n1-6책右相仙源璠曾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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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