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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의(洪有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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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의로(宜老)
생년1557(명종 12)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무신
홍진(洪津)

[상세내용]

홍유의(洪有義)
1557년(명종 12)~미상.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의로(宜老)이다. 본관은 남양(南陽[唐])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창평현령(行昌平縣令) 홍진(洪津)이다. 동생은 홍유례(洪有禮)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시 생원 2등 22위로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후 무과 시험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관직은 의성현감(義城縣監)‧부윤(府尹)‧만포첨사(滿浦僉使)‧안변부사(安邊府使)‧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제주목사(濟州牧使)‧종성부사(鍾城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선조 32) 의성현감 시절 중국 장수(將帥)를 잘 보필하지 못한 죄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602년(선조 35) 종5품 반열에서 종2품 반열인 부윤에 제수되었다가 두 자급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헌부의 건의에 따라 체차(遞差)되었다. 1603년(선조 36) 만포첨사 시절 비밀리에 국경 지역 도적의 우두머리인 노을가적(老乙可赤)이 새로운 성을 만들어 이주한 정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또한, 1605년(선조 38)에는 귀순한 오랑캐로부터 노을가적이 원교근공(遠交近攻)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국방 경비에 소홀하지 않도록 해야 함을 조정에 알렸다. 1609년(광해군 1) 지나친 형장(刑杖) 남발로 사람을 죽이고, 군영(軍營)의 노비들을 다른 읍의 아는 사람들 집으로 보내는 등의 일을 저질렀다가 파직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제주목사 시절 욕심이 지나치고 정사(政事)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등의 행동을 하다가 체차(遞差)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강화(江華)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을 때 영창대군을 함께 살해하자는 수직무장(守直武將) 이정표(李廷彪)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궁궐에서 대비(大妃)가 보낸 옷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영창대군을 위로하는 말을 몇 자 적어서 몰래 전해주었다가 체직되었다.

[참고문헌]

萬曆十七年己丑三月十七日宗系增廣司馬榜目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