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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억령(吳億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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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대년(大年)
호(號)만취(晩翠)
시호(諡號)문숙(文肅)
생년1552(명종 7)
졸년1618(광해군 10)
시대조선중기
본관동복(同福)
활동분야문신 > 문신
오세현(吳世賢)
저서『만취문집』

[상세내용]

오억령(吳億齡)
1552년(명종 7)∼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대년(大年), 호는 만취(晩翠).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 오세현(吳世賢)의 아들이다.

1570년(선조 3) 사마시를 거쳐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예문관검열호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그뒤 이조정랑을 거쳐 경상도안무사로 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사간원집의홍문관전한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가 왔을 때는 선위사(宣慰使)로서 그를 접대하였다.

이때 왜군이 대거 침입할 것을 예감하고 선조에게 치계(馳啓)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일을 만들어 세상을 소란하게 한다고 하여 그를 체직(遞職)하였으나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뒤 다시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등을 거쳐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다.

1591년 진주사(陳奏使)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는 도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개성에서 선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의주에서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고, 그뒤 이조참의 우부승지가 되고 대사성을 거쳤다.

접반사(接伴使) 윤근수(尹根壽)밑에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만나 전쟁의 여파로 발생하는 양국간의 마찰을 해결하는 데 진력하였다.

1593년 환도한 후 대사간도승지대사헌이조참판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그의 승진을 방해하는 자가 많았다. 선조는 그를 몹시 위하여, 조정에서 그를 접반사명나라에 보내려 하자, 선조는 그에게 늙은 아버지가 있으니 다른 인물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황해관찰사로 있을 때 해서(海西)에 머물러 있던 의인왕후(懿仁王后)를 위한 물자징수가 과다하여 폐단이 심하므로 이를 해결하였다.

1601년에는 부제학으로 청백리에 뽑혔고, 1608년 선조가 죽자 고부청시청승습부사(告訃請諡請承襲副使)명나라에 갔으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귀국하여 한때 파직되었다.

그뒤 병조참판한성부판윤대사헌형조판서우참찬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인목대비를 폐하는 데 반대하자 대북파 정인홍(鄭仁弘) 등이 고부사(告訃使)의 일을 다시 들추며 탄핵하여,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멀리 귀양을 보내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4년 동안 처벌을 기다리다가 죽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배천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만취문집』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晩翠文集

[집필자]

정하명(鄭夏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