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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복성(康復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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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명지(明之)
호(號)죽간(竹磵)
생년1550(명종 5)
졸년1634(인조 12)
시대조선중기
본관신천(信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강유선(康惟善)
증조부강중진(康仲珍)
저서『죽간집』

[상세내용]

강복성(康復誠)
1550년(명종 5)∼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명지(明之), 호는 죽간(竹磵). 강중진(康仲珍)의 증손이고 강유선(康惟善)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참봉직장(直長)찰방(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1595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장현광(張顯光) 등과 함께 발탁되어 장수현감이 되었으며, 곧 김제군수로 옮겼는데, 이때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남원에 주둔한 왜적을 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뒤 고양군수천안군수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잠저(潛邸) 때에 시강(侍講)한 인연이 있다 하여 가자(加資)되었으며,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평산부사전주부윤청송부사 등의 외직에 보임된 뒤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제수받았다. 이때 광해군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난정을 행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뒤 다시 부평군수를 제수받았으며, 곧 성주목사로 옮겼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즉시 군대를 모아 인조를 호위하였다. 그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었고, 곧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되어 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노쇠하여 향리인 선산으로 귀향하여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일찍이 재행(才行)을 겸비하고 학술이 정심(精深)한 것으로 천거되었으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표창받은 바도 있었다.

저서로는 『죽간집』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大東野乘
竹磵集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