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각(尹先覺)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4C120AC01B1543X0 |
이명(異名) | 윤국형(尹國馨) |
자(字) | 수부(粹夫) |
호(號) | 달천(達川) |
생년 | 1543(중종 38) |
졸년 | 1611(광해군 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파평(坡平)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윤희렴(尹希廉) |
[관련정보]
[상세내용]
윤선각(尹先覺)
1543년(중종 38)∼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윤국형(尹國馨)으로 개명. 자는 수부(粹夫), 호는 은성(恩省) 또는 달천(達川). 현령 윤희렴(尹希廉)의 아들이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간원정언‧예문관응교‧홍문관부제학‧승정원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자 왜적의 침입에 대하여 무기를 정비하였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을 막아내다 패하여 파직당하였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충청도순변사가 되었고, 판결사(判決事)‧병조참판‧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거쳐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이 되어 왜란 뒤의 혼란한 업무들을 처리하였으며, 광해군초에 공조판서를 지냈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간원정언‧예문관응교‧홍문관부제학‧승정원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자 왜적의 침입에 대하여 무기를 정비하였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을 막아내다 패하여 파직당하였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충청도순변사가 되었고, 판결사(判決事)‧병조참판‧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거쳐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이 되어 왜란 뒤의 혼란한 업무들을 처리하였으며, 광해군초에 공조판서를 지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宣祖修正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김용덕(金龍德)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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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