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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黃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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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미(景美)
호(號)서담(西潭)
생년1542(중종 37)
졸년1606(선조 39)
시대조선중기
본관창원(昌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황탕경(黃湯卿)
외조부오결(吳潔)

[상세내용]

황진(黃璡)
1542년(중종 37)∼1606년(선조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미(景美), 호는 서담(西潭).

부친은 황탕경(黃湯卿)이며, 모친은 오결(吳潔)의 딸이다.

진사로서 1574년(선조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공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당시에는 의주목사로 재직중이었다. 의주에 피난한 선조를 잘 공궤(供饋)하여 그해 8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계되었다.

이듬해 의주목사로서 명나라 원병을 접대하는 소임과 병량(兵糧)을 수운(輸運)하는 일을 잘하지 못하였다는 대간의 질책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으며, 같은해 7월 공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주청사(奏請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진병(進兵)‧철병(撤兵) 등을 요청하였다.

그해 11월 또한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역시 주청(奏請)의 임무를 다해야 했으나 국경에서 배회하다가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 임의로 회정(回程)하여 용천(龍川)에서 머무르던 중 조정의 독촉을 받고 경략지(經略地)에 도착하여 명나라의 원병이 우리나라에 늦게 도착하게 되는 실책을 범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잠시 문책을 받았으나 1594년 6월에 전주부윤으로 나갔다.

그러나 전주수비를 감당할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1595년 의주부윤이 되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나라 원병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으며, 1599년 행호군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정헌(正憲)으로 승계하여 부호군형조판서공조판서우참찬판중추부사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평소에 인망은 없으나 임진왜란 때 왕이 의주에 몽진한 덕에 왕에게 좋은 인상이 남아 이후 중대한 실책이 여러 번 있어 대간의 질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관력은 비교적 평안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대명관계에서 활약이 컸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