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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柳成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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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이견(而見)
호(號)서애(西厓)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542(중종 37)
졸년1607(선조 40)
시대조선중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중영(柳仲郢)
조부유공작(柳公綽)
외조부김광수(金光粹)
출생지의성
묘소안동시 풍산읍 수이리
공신호광국공신(光國功臣)
공신호호성공신(扈聖功臣)

[상세내용]

유성룡(柳成龍)
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유공작(柳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의 아들이며, 모친은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 관직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뒤 정언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皇華集序)」를 찬진(撰進)하였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지었고, 또 그 다음해에 『포은집(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2. 가축옥사때 자핵
이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자핵(自劾)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이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 중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하여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3. 임진왜란 대비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이일(李鎰)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4. 임란시의 군무총괄
4월 14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뒤 충청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으며, 이여송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하여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율이빈(李薲)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해 4월 이여송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조선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5. 학문과 저술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이리 뒷산에 있다. 안동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징비록(懲毖錄)』『신종록(愼終錄)』『영모록(永慕錄)』『관화록(觀化錄)』『운암잡기(雲巖雜記)』『난후잡록(亂後雜錄)』『상례고증(喪禮考證)』『무오당보(戊午黨譜)』『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있고, 편저로는 『대학연의초(大學衍義抄)』『황화집(皇華集)』『구경연의(九經衍義)』『문산집(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하여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영모록』『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增補文獻備考
西厓年譜草本
柳成龍(李載浩, 韓國人物大系 3, 博友社, 1972)
西厓柳成龍의 社會經濟觀(李樹健, 西厓硏究 2, 西厓柳成龍先生紀念事業會, 1979)
壬辰倭亂과 柳西厓의 自主國防策(李載浩, 歷史敎育論集 11, 1987)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명 : "성룡(成龍)"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10懷疑懼浮議囂囂矣柳成龍亦頗不樂李珥譬曉曰鄭德遠仁弘字以草野孤踪盡忠奉公所論雖似過中實是公論豈非可之乎成龍乃不敢言○掌令金誠一在近侍論劾貴近人多畏憚稱爲殿上虎河原君珵以王室至親淫湎縱恣侵害閭里誠一捕繫家奴重
國朝編年v11蓋緣近來珥與士類不相協而怪鬼異論紛然雜出于其間如頃日慶安令瑤面對之辭輒指柳成龍等四人爲專擅而欲斥遠之成龍等俱以淸名雅望取重士林實帷幄之寶臣也瑤言一出士類浸不自安成龍等皆退縮省愆而不敢與於國論於是士類之疑珥
國朝編年v13州牧使金汝岉差從事官成龍問策於砬砬曰李鎰以孤軍南下而無後繼體察使雖下去非戰將宜使武將星馳先往爲鎰後繼成龍乃與應南請對啓如砬言先遣申砬上召問砬砬亦不辭遂以巡邊使行將發上引見砬賜寶釼曰李鎰以下不用命者皆用此釼
國朝編年v14出平壤地圖指示形勢兵所從入之路提督皆以朱筆誌其處曰賊在因中矣倭但恃鳥銃耳我用大砲皆過五六里賊何可當耶成龍旣退提督以律詩寄示成龍其詩云提兵星夜渡江干爲說三韓國未安明主日懸旌節報微臣夜釋酒盃歡春來殺氣心猶壯此
國朝編年v15理卿等勿爲他言宗室大臣三司藝文館皆力爭久而後乃視事○上初欲擇大臣有文辨善處者遣之陳辨言于領議政柳成龍成龍對曰左議政尹斗壽辭病右議政李元翼澌敗如之何特命成龍成龍辭有老母仍以大臣不可牛維馬縶等語白之上頗不懌曰
紀年便攷v15勑来察國事宋應昌出示學曾題本於伺候陪臣尹根壽根壽上聞 上掐領議政柳成龍曰予久知有此事故欲退避今果然矣成龍曰惟當益吾所當為以觧中國之憂可也上曰予之見卿只今日仍賜酒曰以此相訣明日予於夫使前辭位成龍曰天朝憂我國
紀年便攷v15退避今果然矣成龍曰惟當益吾所當為以觧中國之憂可也上曰予之見卿只今日仍賜酒曰以此相訣明日予於夫使前辭位成龍曰天朝憂我國甚至所以榮勵耳何遽出此言翌日 上幸館所袖出御帖極陳病不能任國事欲傳位世子望賜主張天使卽於
紀年便攷v15有李盡忠者自請入京探賊情遂見二王子及黃廷或䓁還言賊有講和意既而賊投書於龍山舟師乞和千鎰送其書於柳成龍成龍示查大受於是如松使惟敬来与胡澤沈思賢䓁會遺正行長於龍山船上各議和行長䓁猶欲圍住惟敬國守京城要封貢秀家
紀年便攷v15継光紀效新書禦倭法所以勝也 上密令購得於麾下命柳成龍與從事李時發及儒生韓嶠䓁講質于天将及還都設都監以成龍為都提调趙儆為大將辛慶晉李弘冑為郞屬著飢民為兵能舉一巨石能超一丈墻者入格旬日得數千人教以戚氏三乎砲射
紀年便攷v15以為國勢危如一髮須少緩兵鋒則可圖自強而顧侍郞手握大兵高下在心我國旣不能戰又不能守只禁中朝之和似是失筞成龍曰我國旣無以自振但倚中國以圖興復而顧侍郞所言一向堅拒任事之人拂然不肯同心則我國之事旡乃盖睽孤手備局諸
紀年便攷v15上聞成龍渾言大怒両人惶恐而退 上有詩曰一死吾寧認求和願不聞如何倡邪說敗義惑三軍凢今朝廷為成渾邪說所誤命搒示朝
紀年便攷v15軍凢今朝廷為成渾邪說所誤命搒示朝堂渾不敢自明金宇顒論渾曰必須早正王法然后旡愧於朝宗有辭於後世李爾瞻劾成龍奸邪主和成龍辭免
紀年便攷v15成渾邪說所誤命搒示朝堂渾不敢自明金宇顒論渾曰必須早正王法然后旡愧於朝宗有辭於後世李爾瞻劾成龍奸邪主和成龍辭免
紀年便攷v15旣無以自振但倚中國以圖興復而顧侍郞所言一向堅拒任事之人拂然不肯同心則我國之事旡乃盖睽孤手備局諸議皆如成龍言 土不淂已從之上聞成龍渾言大怒両人惶恐而退 上有詩曰一死吾寧認求和願不聞如何倡邪說敗義惑三軍凢今朝
紀年便攷v15賊專奏傆留應㤗由是移怒搆誣罔測 上避殿撤朝籍藁俟命命柳成龍以陳奏之行成龍辭以母老 上不懌李爾膳劾成龍成龍辭相李恒福代為右相以正使赴京兵曺叅議李廷龜製進奏文 上覧而嘉之擢為工曺叅判仍充副使以送以奏文名闻天下
紀年便攷v15舊土其說奇巧萬端時本國以鎬銳意討賊專奏傆留應㤗由是移怒搆誣罔測 上避殿撤朝籍藁俟命命柳成龍以陳奏之行成龍辭以母老 上不懌李爾膳劾成龍成龍辭相李恒福代為右相以正使赴京兵曺叅議李廷龜製進奏文 上覧而嘉之擢為工
紀年便攷v15意討賊專奏傆留應㤗由是移怒搆誣罔測 上避殿撤朝籍藁俟命命柳成龍以陳奏之行成龍辭以母老 上不懌李爾膳劾成龍成龍辭相李恒福代為右相以正使赴京兵曺叅議李廷龜製進奏文 上覧而嘉之擢為工曺叅判仍充副使以送以奏文名闻
紀年便攷v15壬辰亂後成龍七年秉政南人布列臺省以李慶全為浮薄不許禮卽於是北人常欲因事劾罷之及戊戌辨誣之行成龍以母老不肯行 上意甚不平鄭仁弘嗾其徒正言文弘道極口詆斥主和之非擬以盧杞秦擋 上乃命削奪至是左議政李元
紀年便攷v15壬辰亂後成龍七年秉政南人布列臺省以李慶全為浮薄不許禮卽於是北人常欲因事劾罷之及戊戌辨誣之行成龍以母老不肯行 上意
紀年便攷v15歴翰林舍人銓郞直學副學典文衡選清白吏甞以書狀朝京太學諸生聚觀者數百成龍問 中朝名儒相顧言王陽明陳白沙成龍曰白沙見道不明陽明主禪學皆不如薛文清之正學有一生前曰士失趍嚮久矣公能正之吾道幸矣及序班引僧道二流立之
紀年便攷v15一心奉公時有顧瞻利害之意君子以是短焉後以緩於攻西故被斥於山海汝諄軰又分為南人初成龍與李潑有隙成龍一隊成龍為首而金誠一李誠中李德馨爲羽翼潑一隊潑為首而鄭汝立崔永慶鄭仁弘䓁爲羽翼仁弘遂與成龍永為仇敵始有南北之
紀年便攷v15建明沮戱乃已至壬辰有李文靖真聖人之歎後乃變貢案立訓錬卒如珥之計當倭寇斥充天兵滿城之日羽書旁午文移山積成龍到省則以申欽疾書命為執筆口呼成文迅如風雨茟不停寫文不加點真奇才也李德馨李恒福其亞也嶺人稱李元翼可欺而
紀年便攷v15甲子生進俱中丙寅登别試宣祖朝選湖堂歴翰林舍人銓郞直學副學典文衡選清白吏甞以書狀朝京太學諸生聚觀者數百成龍問 中朝名儒相顧言王陽明陳白沙成龍曰白沙見道不明陽明主禪學皆不如薛文清之正學有一生前曰士失趍嚮久矣公
紀年便攷v15沙見道不明陽明主禪學皆不如薛文清之正學有一生前曰士失趍嚮久矣公能正之吾道幸矣及序班引僧道二流立之前列成龍曰冠帶之列不可以道释在前鴻臚官大慚卽却之宣祖庚寅入相。至領榮光國功尋封豊原府院君又第扈聖功二等入相後
紀年便攷v15能收拾恒福謝之是時成龍為平安道都軆察使又為両湖嶺南都軆察使有㓛社稷中興名相戊戌正言文弘道承仁弘嗾。誣成龍以盧杞秦檜被削爵己亥還授職牒鑑識絶人汝立踵門求見辭以疾李爾瞻以太學生納拜終不見以沮斥李珥為東人領袖盖
紀年便攷v15第扈聖功二等入相後兼文衡吏兵判壬辰西幸至碧蹄驿 上召諸臣曰計将安出李恒福曰若勢竆力屈則便可赴愬 天朝成龍曰 大駕離東土一步朝鮮非我有也 上曰內附予本意也成龍退而責恒福曰何為輕發棄國之論耶君雖従死道路不過為
紀年便攷v15美伹不能一心奉公時有顧瞻利害之意君子以是短焉後以緩於攻西故被斥於山海汝諄軰又分為南人初成龍與李潑有隙成龍一隊成龍為首而金誠一李誠中李德馨爲羽翼潑一隊潑為首而鄭汝立崔永慶鄭仁弘䓁爲羽翼仁弘遂與成龍永為仇敵始
紀年便攷v15與李潑有隙成龍一隊成龍為首而金誠一李誠中李德馨爲羽翼潑一隊潑為首而鄭汝立崔永慶鄭仁弘䓁爲羽翼仁弘遂與成龍永為仇敵始有南北之分丁未卒年六十六謚文忠子袗字季華號修巖鄭逑門人光海庚戉進壯有學行薦授官官止持平従享
紀年便攷v16無才居官不治又有簠簋之誚甞上䟽斥和倭柳成龍在領台主和議穆以講和誤國抵書甚峻截後與成隙初為陜川問去就於成龍成龍答曰人之去就如寒㬇人自知之恕及成龍放歸也穆以書逆之曰寒暖二字還送云云師之喪心喪三年所著有困知雜錄
紀年便攷v16成龍答曰人之去就如寒㬇人自知之恕及成龍
紀年便攷v16成龍答曰人之去就如寒㬇人自知之恕及成龍
紀年便攷v16素為郷隣士友所畏服壬辰以前掌令自陕川自称義兵将專事作亂嗾其昵客文弘道極口詆斥柳成龍擬以盧祀秦檜乃命削成龍職光海壬子入相至領首發廢母之論殺臨海永昌劄請先除七臣先王顧命七臣以折永昌羽翼兒時題小松曰数尺椎松古塔
紀年便攷v16成龍見湖堂
歷代帝王紀年v01成龍兄謙菴
國朝捷錄v01季華修庵成龍子持平
國朝捷錄v01成龍曾孫校理字爾能元履子
郯述v01庚戌進 父成龍豊山持平
郯述v02父元履成龍曾孫
國朝人物志v2魁不饒賦役稍得平文獻堂學錢不繼檢得贖布作千斛租貯之名曰作成庫學徒坌集絃誦日聞人物考子成龍見下
國朝人物志v2隣邑不敢下手設爲方略勦捕瓦解拜原州牧使赴任未幾以親老辭歸上疏陳軍國大要贈判書諡文敬弟成龍東儒師友錄年十五悉通小學四書以及經史不喜擧業師事退陶墓誌
國朝人物志v2退溪李滉學滉曰此兒天所生也甲子生員進士丙寅文科選翰苑以書狀官如明太學生會觀者數百人成龍問本朝名儒相顧言王陽明陳白沙二人成龍曰白沙見道不明陽明主禪皆不如薛文淸
國朝人物志v2銃法領相柳成龍於上前親作試放狀擧措頗不佳東賢卽進曰今日聖上無望國家之中興也成龍以首相親作放砲狀於經席安有大臣體貌如是而能中興乎上瞪視不答及罷西崖出語人曰今日朴東賢言
國朝人物志v3丁卯虜果入寇降將弘立蘭英爲導進逼安州請見主將元帥欲使命龍行而龍灣之陷其兄成龍先死元帥愍然不忍發口命龍請往至虜營延接無禮命龍却立責之虜改容謝因誘以和命龍曰守
國朝人物志v3性傳南北之論始岐急者目爲北李山海李爾瞻緩者目爲南柳成龍禹性傳壬辰山海汝諄竄成龍罷尹斗壽爲相癸巳成龍還入相金應南鄭琢相繼入相乙未琢請放山海從之臺諫劾琢遞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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