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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洪可臣)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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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흥도(興道)
호(號)간옹(艮翁)
시호(諡號)문장(文莊)
생년1541(중종 36)
졸년1615(광해군 7)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양(南陽[土])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온(洪昷)
외조부신윤필(申允弼)
저서『만전집』
공신호청난공신(淸亂功臣)

[상세내용]

홍가신(洪可臣)
1541년(중종 36)∼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남양(南陽[土]).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부친은 홍온(洪昷)이며, 모친은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 1571년(선조 4) 강릉참봉(康陵參奉)이 되었을 때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되고 이어 형조좌랑지평을 거쳐 1584년 안산군수를 지냈다.

1588년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공이 있어 표창을 받았으나 평소에 정여립(鄭汝立)과 가까이 지냈다 하여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 때 파직당하였다가 1593년 파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홍주목사로 부임하여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하여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강화부사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지내고, 1604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寧原君)에 봉하여졌다. 광해군장례원정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1610년 형조판서에 이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아산에서 죽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로 사문(師門)의 촉망을 받았으며, 체계있는 학문을 전수받아 문장으로서 조직적인 화실(華實)의 매력을 갖춘 외에 성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문(斯文)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이기(理氣)의 본질을 우주의 본질로서 간파하여 기와 이로 보고, 기와 이의 순환과정에서 만물이 생성하며 음양으로 조화, 분리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동조하면서, 생사분리(生死分離)를 주장하는 노자철학과 인간생명을 허무적멸(虛無寂滅)로 떨어뜨리는 불교관을 배척하였다.

아산인산서원(仁山書院)온양정퇴서원(靜退書院)에 봉안되어 있다.

저서로는 『만전집』『만전당만록』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순두(李純斗)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10-30시호를 문장(文壯)에서 문장(文莊)으로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