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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희(金公喜)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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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지명(之明)
호(號)지천(芝川)
생년1540(중종 35)
졸년1604(선조 37)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윤(金胤)
조부김영석(金英碩)
증조부김완(金琬)
처부조신(曺信)
외조부정인걸(丁仁傑)

[상세내용]

김공희(金公喜)
1540년(중종 35)∼1604년(선조 37).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지명(之明) 또는 지천(芝川)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증조부는 김완(金琬)이고, 조부는 김영석(金英碩)이고, 부친은 김윤(金胤)이다. 외조부는 정인걸(丁仁傑)이고, 처부는 조신(曺信)이다.

1576년(선조 9) 병자(丙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며, 1580년(선조 13) 경진(庚辰) 별시(別試)에 을과(乙科) 7위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종사관(從事官)영광군수(靈光君守)를 거쳐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다.

1589년(선조 22) 10월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조대중(曺大中)은 백성의 재앙과 피해를 순찰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보성(寶城)에 이르러 군적강(軍籍講)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김공희(金公喜)영광군수(靈光君守)로서 담양부사(潭陽府使)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시험관으로 참석하였다.

조대중보성에 도착하여 자신이 아끼던 부안(扶安)의 관기(官妓)와 이별하며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서인(西人)들이 “정여립(鄭汝立)이 죽으니 조대중이 이를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고 맨밥을 먹었다.”고 날조하여 공소(控訴)당하였다.

1590년(선조 23) 국문(鞠問)을 당한 조대중정여립과 잔당이 굴복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은 광주(光州)의 향가(鄕家)에 있었으며, 담양부사(潭陽府使) 김여물과 함께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며 역적의 소탕을 경하(慶賀)하였다고 답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김여물이 증인으로 서기 위하여 서울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도 국청에서는 그를 불러 물어보지 않았으며, 김공희 또한 조대중이 죄가 없음을 증언하기 위해 상경하여 대궐 밖에서 3일 동안이나 기다렸다. 그러나 서인(西人)으로 당시 국청(鞫廳) 대신이었던 정철(鄭澈)이 증언하러 온 그에게 한마디도 묻지 않고 조대중을 죽이자 크게 탄식하였다.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남계(南溪) 김윤(金胤)서곡(書谷) 임분(林賁)죽곡(竹谷) 임회(林薈)기봉(岐峰) 백광홍(白光弘)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풍잠(風岑) 백광안(白光顔)동계(東溪) 백광성(白光城)과 함께 기산팔현(岐山八賢: 조선 八文章 중 1인인 기봉 백광홍 및 그와 동문수학 하였으며 동시에 사마시에 합격한 7명의 학자들을 일컬음)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다.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안양면(安良面)기양사(崎陽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오성지
화순향토지
광산김씨대종회(http://kwangsankim.or.kr/)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집필자]

전종헌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