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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吳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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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태원(太源)
호(號)죽계(竹溪)
생년1540(중종 35)
졸년1617(광해군 9)
시대조선전기
본관고창(高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오수정(吳守貞)
출생지함안
저서『죽유문집』
공신호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상세내용]

오운(吳澐)
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 조선 전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고창(高敞). 함안 출생.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

오수정(吳守貞)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학정박사전적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北道助戰將)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뒤 충주목사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성균관사성을 지낸 뒤 사재감정이 되고, 1589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아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때 백령(白嶺)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전후 2만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부근의 전투와 현풍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 상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璘)제독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동고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東史纂要)』가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龍蛇列錄
17세기초의 歷史敍述(韓永愚, 韓國史學 6, 1985)

[집필자]

김석희(金錫禧)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