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열도(李閱道)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5F4B3C4U9999X0 |
자(字) | 정가(靜可) |
호(號) | 우암(遇巖) |
생년 | 1538(중종 33) |
졸년 | 1591(선조 24)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진성(眞城)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상세내용]
이열도(李閱道)
1538년(중종 33)∼1591년(선조 24).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정가(靜可)이고, 호는 우암(遇巖)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예천(醴泉)이다.
증조부는 이식(李埴)이고, 조부는 이하(李河)이다. 부친 이굉(李宏)과 모친 부장(部將) 김수량(金遂良)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목사(牧使) 남희석(南希奭)의 딸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통명하고 재능이 있었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 병과 1위로 문과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고령현감(高靈縣監)‧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형조정랑(刑曹正郞)‧금산군수(錦山郡守) 등을 역임한 후, 강원도도사(江原道道事)에 제수되었으나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흉년 든 해에 경산지방에 현령으로 추천되자 기꺼이 나가서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제대로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치고, 충효를 가르쳐 마을 전체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 후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1563년(명종 18)에 고향 내성천(乃城川) 바위 위에 지어놓은 ‘선몽대(仙夢臺)’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내다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진남(李鎭南)‧이흥남(李興南)‧이경남(李慶南)이다.
증조부는 이식(李埴)이고, 조부는 이하(李河)이다. 부친 이굉(李宏)과 모친 부장(部將) 김수량(金遂良)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목사(牧使) 남희석(南希奭)의 딸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통명하고 재능이 있었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 병과 1위로 문과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고령현감(高靈縣監)‧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형조정랑(刑曹正郞)‧금산군수(錦山郡守) 등을 역임한 후, 강원도도사(江原道道事)에 제수되었으나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흉년 든 해에 경산지방에 현령으로 추천되자 기꺼이 나가서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제대로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치고, 충효를 가르쳐 마을 전체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 후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1563년(명종 18)에 고향 내성천(乃城川) 바위 위에 지어놓은 ‘선몽대(仙夢臺)’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내다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진남(李鎭南)‧이흥남(李興南)‧이경남(李慶南)이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陶山及門諸賢錄
柳川先生文集
陶山及門諸賢錄
柳川先生文集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 | 수정내역 |
---|---|
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