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응록(趙應祿)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C751B85DB1538X0 |
자(字) | 경수(景綏) |
호(號) | 죽계(竹溪) |
생년 | 1538(중종 33) |
졸년 | 1623(인조 1)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풍양(豊壤)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덕기(趙德期) |
저서 | 『죽계유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응록(趙應祿)
1538년(중종 33)∼1623년(인조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수(景綏), 호는 죽계(竹溪). 찰방 조덕기(趙德期)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7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전적(典籍)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피난가는 세자를 호종하고, 난이 끝난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1599년 풍덕군수가 되고,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계축옥사 때 삭직당하였으나 호성(扈聖)의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풍녕군(豊寧君)에 봉하여졌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의 공훈을 삭훈할 때 관작을 추탈당한 이후 임천(林川)의 전리로 돌아가 저서에 힘썼다. 그는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고 대비의 호를 깎아서 서궁이라 칭하게 하는 간당백료(奸黨百僚)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강직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저서로는 『죽계유고』가 있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7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전적(典籍)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피난가는 세자를 호종하고, 난이 끝난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1599년 풍덕군수가 되고,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계축옥사 때 삭직당하였으나 호성(扈聖)의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풍녕군(豊寧君)에 봉하여졌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의 공훈을 삭훈할 때 관작을 추탈당한 이후 임천(林川)의 전리로 돌아가 저서에 힘썼다. 그는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고 대비의 호를 깎아서 서궁이라 칭하게 하는 간당백료(奸黨百僚)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강직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저서로는 『죽계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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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