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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함(尹仁涵)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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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양숙(養叔)
호(號)죽당(竹堂)
생년1531(중종 26)
졸년1597(선조 30)
시대조선전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응규(尹應奎)
저서『죽재집』

[상세내용]

윤인함(尹仁涵)
1531년(중종 26)∼1597년(선조 3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양숙(養叔), 호는 죽재(竹齋)죽당(竹堂). 첨정 윤응규(尹應奎)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553년(명종 8) 진사가 되고, 155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대교를 거쳐, 1559년 흥문관정자가 되었고, 이어 저작박사부수찬지제교 등을 지냈다.

1561년 병조이조좌랑을 지낼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3년 이조정랑으로 재직중 이량(李樑)과 친교가 있었다는 무소(誣疏)와 동료들에게 전선(銓選)에 관한 기밀을 누설한 죄로 파직되었다.

그뒤 성균관전적에 등용되어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을 거쳐 부모를 모실 뜻으로 외직인 풍덕군수가 되었고, 다시 양주목사로 옮겨갔다.

1578년(선조 11) 사복시정, 1581년 황주목사를 지내고 1584년 동지사명나라에 다녀와 공조호조참의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이었는데, 정부에서 그가 유신(儒臣)으로 나약하고 겁을 낸다 하여 교체하였다. 판관 박의장(朴毅長)이 혼자 성안에 있다가 적이 언양에서 지름길로 들이닥치자 성을 비우므로 경주성이 함락되었다. 인함은 의병을 모집하여 적병 수백명을 죽였다.

뒤에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호서(湖西)의 관찰사가 되었으나 곧 파직되고, 호조참의에 재임한 뒤 1596년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이듬해 정유재란 때 영위사(迎慰使)를 겸하여 명나라 장수를 평양으로 영접하러 나갔다가 죽었다.

문장과 그림에 능하였고,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려 호를 죽재라 하였다 한다.

저서에 『죽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槿域書畵徵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